무대의 막이 오르면 유프라데스 강변 새벽 언덕, 노예생활에 지친 히브리인 무리가 여기 저기 쓰러져 있다. 해뜨기 전 그 무렵이 가장 춥고 어둡다고 했던가? 기약 없는 바빌론 포로 생활, 하루 하루를 견디기 힘든 중노동의 노예생활, 옛날처럼 영광스런 국가를 일으키리라는 예언은 과연 이루어 질 것인가?
그 때, 잠을 깨우듯 심장 저 깊은 곳을 어루만지는 오케스트라 연주가 시작된다. 하나 둘 몸을 일으킨 히브리 노예들이 합창을 시작한다. 그 합창은 곧 절절한 염원이 되고, 뜨거운 기도가 되고, 드디어 막힌 둑을 타고 넘는 힘찬 물결이 된다.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 그 중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 주는 감동이다. 한 예술가의 뜨거운 혼(魂)이 히브리인의 역사를 빌어 잠자던 이태리 민족혼을 깨웠다. 정치가의 뛰어난 웅변보다, 종교인의 신령한 설교보다 더 깊고 큰 감동으로 민족의 정체성을 확인시켰다. 그리고 드디어 이태리인들은 그 꿈을 이루어 독립 통일 민족국가를 건설했다.
세계화(世界化ㆍGlobalization)
역사상 많은 민족들이 다른 민족에게 동화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한 때 세계를 호령하던 강대국들의 성읍(城邑)이 잡초 가득한 폐허가 된 경우를 종종 본다.
피라미드 아래, 1달러짜리 허름한 기념상품을 내미는 찌든 손. 지난 날의 찬란한 인류 문명이 오늘날은 고작 관광 수입의 원천일 뿐이다. 그들의 현실을 가슴 아픈 마음으로 바라 보다가 문득 지구 저쪽의 내 나라를 생각한다. 오늘의 동아시아로 눈을 돌린다. 국가란 무엇인가? 민족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지키며 살아야 할 것인가?
이제는 더 이상 민족이니 국가니 하는 개념이 사라지고 세계화된 여러 겹의 층(層ㆍ Layer) 그 어느 곳에 우리가 속하여 살게 된다는 얘기를 듣는다. 전쟁도 없고, 국가나 민족간 갈등도 없다. 세계화의 틀 안에서 인류는 편안한 삶을 누리며 살 것이다. 새로운 종교를 포교하듯 확신을 가지고 세계화를 말하는 나라들이 있다.
해군력에 대한 이 연재를 시작할 때 대륙간 무역 물동량의 99%, 금액 기준으로는 80%가 바다를 통해 이루어 진다는 사실을 얘기하면서 경제활동, 통신망 연결, 해상 운송로 그리고 군사력 전개를 나타낸 지도를 제시한 적이 있다. 세계화는 바로 그런 흐름(Flow)이다. 그 흐름이 빨라질수록, 도달하는 수역(水域)이 넓어질수록 그 흐름을 장악한 세력이 차지하는 이익의 몫이 커진다.
타이어 마한이 얘기한대로 ‘바다라는 넓은 공로(公路)’를 지배하기 위해, 곧 세계화의 흐름을 지배하기 위해 각국은 해군력을 투사한다. 투사된 해군 군사력이 그 흐름 즉 세계화를 유지한다. 세계화는 공로(公路)를 지배하는 나라의 언어로 표현된 불공정과 일방주의의 다른 이름이다.
해군력, 그 기능
그렇다면 해군이란 무엇인가? 말 그대로 바다에서 운용되는 군사력이다. 같은 군사력이지만 육군과는 본질적으로 기능이 다르다. 육군은 인간이 거주하는 지역이나 영역(領域ㆍTerritory), 사람을 통제하지만 해군은 그 곳으로의 접근통로(通路ㆍAcess) 및 국가간의 교류체계를 통제한다. 해상교통로의 보호ㆍ봉쇄, 함대의 배치, 해군력의 투사ㆍ현시(顯示ㆍPresence)등을 통해 어느 지역에 대한 접근 즉 흐름을 제한하거나 거부한다. 따라서 해군력은 세계화의 가장 중요한 통제수단이다.
위풍당당한 항공모함 전단을 투입하여 상대방의 기를 꺾고 공개적으로 군사력을 시위하며 압박하지만, 때로는 깊은 바다 밑을 은밀하게 잠행하는 잠수함으로 ‘보이지 않는 위협’을 행사하며 상대방의 접근을 거부한다.
스스로 자랑스럽게 밝히 듯, 이제 미국 해군은 ‘세계 해군(World Navy)’이다. 국제 금융과 무역의 기축 통화인 달러, 세계 교역의 공용어로 사용되는 영어와 함께 미국 해군은 세계 해군이 됐다. 세계화의 큰 흐름을 장악한 미국이 지역적 흐름의 내용과 속도와 크기를 조절한다.
일본은 발 빠르게 미국 해군력 투사에 편승하여 최소한 국가 생존 통로를 확보했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는 전적으로 국제법과 미국의 우호적 조치와 시혜(施惠)만을 바라본다. 우리나라의 생명선인 해상수송로를 보호할 아무런 군사적 대책이 없다.
중국은 태평양에서부터 인도양 서쪽 아프리카 연안까지 그 해군력을 확대하려 할 것이다. 미국과 중국간에 세계적 패권 경쟁이 일어나기 전 단계로 지역적 패권경쟁이 필연이라고 보는 중요한 근거이다. 러시아와 군사ㆍ경제적 협력을 강화하면서, 러시아의 석유 수송 파이프 라인을 중국 쪽으로 돌리려고 일본과 치열한 경쟁을 한 것도 장래에 예상되는 해양 봉쇄에 대비한 장기적 포석이다.
‘흐름’을 놓치는 우리의 안보정책
이제까지는 대북 억제전력(對北 抑制戰力) 확보가 우리 군사력 건설의 우선적 관심이었다. 잠재적 위협(潛在的 威脅)에 대한 대비는 주변국가와의 관계 때문에 공식적으로 밝貪竪?어렵겠지만 실제로 상당히 미흡하게 보인다.
우리해군이 추구하는 해군력 건설도 기본적으로 정부가 천명한 ‘협력적 자주국방’과 ‘포괄안보지향’의 틀 안에서 이루어 질 것이다. 따라서 국가안보의 관심영역을 동북아시아로 축소한 참여정부의 기본 인식을 뛰어 넘지 못하는 한계를 가진다.
늦어도 15년 이내, 즉 2020년께까지는 경항공모함, KDX-III급 이지스 구축함, 대형 상륙함, 잠수함, 항공전력 등으로 구성되는 전략기동함대가 구축된다. 평시에는 전관경제수역(EEZㆍExclusive Economy Zone) 외곽을 차단하며 분쟁 예상해역을 초계하는 것을 주 임무로 한다. 전쟁이 일어나거나 분쟁이 발생하면 현장에서 대응하여 격퇴하고 상대방의 전략 목표를 타격할 것이다.
중국의 작전 해역이 1,000해리이고 일본의 작전 해역은 2,000해리인데 기동함대의 작전 해역은 이에 훨씬 못 미칠 것이다.
우리나라의 사활적 이해관계가 걸린 해상 수송로의 보호는 국제 협력에 의지한다. 국제협력이라 말하지만 그 실상은 미국 해군력에 의지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미국이 제시하는 해양 활동의 기준과 표준, 미국 주도하에 제정된 국제법을 따르면서 우리나라의 생존을 미국에게 전적으로 의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40여 년 전, 한국이 자주국방의 구호를 내세우며 국방력 건설을 시작할 즈음, 미국은 한국이 지상군(육군) 세력 건설에 집중할 것을 강력히 주문했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할 경우 한미방위조약에 따라 미국이 72시간 이내에 육군 지원 세력뿐만 아니라 충분한 공군력과 해군력을 지원하겠다는 약속과 함께. 당시의 안보 상황이 그렇기도 했지만 미국으로서는 한국군이 한반도 영역 밖에서 독자적 군사활동 능력을 갖는다는 것은 지금이나 그때나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우리나라도 원자력 잠수함을 건조하자고 주장하는 데 이것을 포함한 우리 해군력 건설의 바람직한 방향, 현재 추진중인 계획의 구체적 내용, 해군력 투사의 제약조건 등에 관해서는 앞으로 몇 회에 걸쳐 좀 더 상세히 다루려 한다.
수 천년 동안 고난을 이기며 걸어 온 우리민족의 끈질긴 역사를 뒤돌아 보면서 앞으로 우리에게 얼마나 시간이 남아 있는지, 우리가 걸어가야 할 그 길이 어떤 길인지 가늠해본다. 무엇이 우리나라의 독립과 자존, 번영을 담보하고 우리나라답게 하는 우리의 정체성일까? 쉴새 없이 거친 파도가 몰려오는 21세기, 우리는 어떻게 무엇으로 살아갈 것인가?
한편의 오페라를 보면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한 채 숨죽이고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들으면서, 분열과 외국 지배를 벗어나 통일 민족국가 건설을 다짐하던 이태리인들. 그들은 그 꿈을 이루었다.
우리도 우리의 꿈을 이룰 것이다.
윤석철객원기자 ysc@hk.co.kr
●정부의 국가안보 전략기조
2004년 3월1일, 국가안전보장회의(NCS)는 ‘평화번영과 국가안보-참여정부의 안보정책 구상’을 발간 배포하면서 국가이익, 국가안보 목표, 국가안보 전략기조 등을 발표했다.
국가 안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4가지 전략기조는 평화번영정책 추진, 균형적 실용외교추구, 협력적 자주국방추진, 포괄안보지향이다.
현실적으로, 우리 능력만으로 국가의 생존과 국민의 안전을 완전히 보장하기가 불가능하므로 한미 군사동맹과 자주국방 두 가지를 아울러 발전시키겠다는 것이 ‘협력적 자주국방’이다. 대외 안보협력을 활용하여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고 만일 북한의 도발에 의해 전쟁이 일어난다면 우리가 주도적으로 역할을 수행하여 격퇴할 수 있는 능력과 체제를 구비하자는 구상이다.
‘포괄안보 지향’을 천명하면서 다양한 안보위협에 대한 인식은 보여줬지만 그 인식에 근거한 구체적 전략은 ‘전방위 국제협력 추구’라는 개념아래 외교적 협력만을 거론하고 있을 뿐이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