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십 수년간 지역주의를 주제로 한 토론회ㆍ세미나ㆍ강연회 등이 전국적으로 얼마나 열렸을까? 아마 수천 번이 넘을 것이다. 지역주의를 주제로 한 책ㆍ논문ㆍ칼럼 등은 얼마나 될까? 수천 건이 넘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땀이 배어있을 그 성과물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그게 어디로 갔기에 우리는 지역주의 이야기만 나오면 그간 아무런 논의도 없었다는 듯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가?
지역주의보다는 지식ㆍ정보의 축적과 활용이 없는 이런 엉터리 문화가 훨씬 더 큰 문제가 아닐까? 그간 제시되었던 지역주의 해소책엔 대략 10가지가 있었다는 걸 상기하면서 모두 다 이성을 회복하도록 하자.
●기존 논의 성과 하나씩 되짚어야
첫째, 선거구제 개편이다. 최근 노무현 대통령이 정권마저 내주겠다며 밀어 붙이고 있는 방안이다. 선거구제 개편의 효과는 크겠지만, 그건 지역주의 해소를 위한 올바른 출발점에 서는 것 뿐이며 엄청난 부작용을 낳을 ‘대연정’을 정당화할 정도는 아니다. 선거구제 개편은 착실하게 상호 신뢰와 진정성에 기반해 추진해 나갈 일이다.
둘째, 인사의 공정성이다. 정부 인사를 정권이 독식하는 건 당연하지만, 그렇게 해선 지역주의 해소는 영영 기대하기 어렵겠다는 게 분명해졌다. 선거에서의 승자 독식주의와 논공행상 때문이다. 대통령 인사권 행사 방식에 대한 공론화가 필요하다.
셋째, 예산 배분의 공정성이다. 이는 인사의 공정성과 맞물려 있는 사안이다. 멀쩡하던 한국 유권자들이 선거 때만 되면 잠재돼 있던 ‘지연 유전자’가 발동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 예산 문제 때문임을 직시해야 한다.
넷째, 경로의 점진적 수정이다. 경로란 이미 굳어진 지역간 불균형 발전 상태를 말한다. 바로 여기서 기득권ㆍ분노ㆍ한(恨)과 같은 지역주의 영양분이 공급된다. 경로 수정을 위한 장기 계획을 국민적 합의로 추진해야 한다.
다섯째, 지역간 교류다. 사실 이게 그간 가장 왕성하게 이루어진 지역주의 해소책이었다. 이는 지역간 오해를 해소하는 수준의 효과 밖엔 없지만, 그거나마 소중하게 여기면서 계속 추진해 나가야 할 것이다.
여섯째, 언론 개혁이다. 언론은 구조적으로 지역주의 해소에 기여하기 어렵게 돼 있다. 지역주의 확대재생산이 시장논리화 돼 있다는 뜻이다. 이는 정치인들이 지역주의에 영합할 때에 지지를 얻을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언론개혁도 지역주의 해소책이다.
일곱째, 사회 개혁이다. 진보주의자들의 처방이다. ‘보수정치’보다는 ‘진보정치’가 지역주의 해소에 더 기여할 수 있다는 건 두말할 필요가 없지만, ‘진보’만으로 지역주의를 해소할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하다.
여덟째, 문화 개혁이다. 한국사회에 만연돼 있는 ‘패거리 문화’ ‘왕따 문화’와 지역주의는 분리될 수 있는 게 아니다. 분리될 수 있다는 착각이 오히려 지역주의 해소를 어렵게 만든다. 인내심을 잃고 과격한 모험주의를 선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장기적 비전과 인내 절실
아홉째, 교정적 리얼리즘이다. 그간 대중매체는 ‘리얼리즘’이란 미명하에 특정 지역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확대 재생산해왔다. 교정의 노력을 게을리 해선 안 된다.
열째, 행정구역 개편이다. 지난 4월 정치권은 전국 광역 시ㆍ도를 없애는 행정구역 개편안을 제시했는데, 이 방안의 문제는 효과 대비 비용 계산을 제대로 해보았느냐 하는 점일 것이다.
지역주의 해소엔 장기적 비전과 인내가 필요하다. 한국인의 ‘빨리빨리’ 기질이 IT 시대에 각광을 받고 있다곤 하지만, 이것만큼은 ‘빨리빨리’로 돌파할 수 있는 성격의 일이 아니다. 늘 정치인들만 ‘죽일 X들’이고 국민만 피해자라는 선동 구호도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국민에 대한 아첨이 지역주의 해소를 어렵게 만드는 한 이유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전북대 신방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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