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끝에 두 여자를 만났다.
더없이 사랑스러우나 사랑할 수 없어서 아름답고, 아름다우나 아름다움만으로는 존재의 절반도 설명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그녀들. 냉방병에 시달리며 분별 없이 쿨럭거리던 내게 서늘한 바람처럼 불어와 뻑적지근한 문명의 열병을 다소곳이 식혀준, 자연냉각수 같은 그녀들. 우연히, 한꺼번에 조우하게 된 그녀들 덕분에 무기력하게 보낸 지난 여름이 갑자기 의미심장해진다.
아름다운 여인이란 그런 존재다. 가장 극렬하게 세상과 맞서면서도 절정의 한 순간 세상의 복판에서 살짝 비껴서 한없이 공허해진 눈빛만 아롱아롱 반짝이는 순한 야수성의 현현.
그녀들은 인간의 가혹한 정념 한가운데서 비로소 자신의 아름다움을 빛내지만, 그 아름다움의 진원지를 돌아보면 그녀들은 늘 세상의 외곽에 길들여지지 않은 짐승새끼처럼 머물러있다.
우리가 냄새 맡는 아름다움은 그 작은 외곽에서 흘러와 거대한 중심을 휘감아 도는, 냉엄한 듯 푹식푹신한 야성의 향기다. 그 보기 드문 야성녀들의 이름은 스밀라와 금자씨이다.
스밀라를 다시 만난 건 8년만이다. 그때도 지금처럼 무더운 여름이었다. 그러나 8년 전의 스밀라는 내게 반쪽 짜리에 불과했다. 이 말은 두 권으로 나온 ‘눈에 대한 스밀라의 감각’(전2권, 정영목 옮김, 까치글방)의 첫 번째 권만 읽었다는 뜻 보다는 내가 스밀라를 받아들이는 방식을 의미하는 게 더 크다.
사랑에 갈급하던 27살의 내게 스밀라는 아름다우나,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그녀는 어머니보다는 엄한 여 사제에 가까웠고, 연인보다는 사사로운 잘잘못을 질책하는 심술궂은 누이에 더 어울렸다.
꼬마 이사야가 되기에 나는 올드보이 오대수처럼 말이 너무 많고, 세상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데 잔뜩 겁을 집어먹고 있었으며, 수리공 페터가 되기엔 타인의 깊은 속을 섣불리 간파하려다가 스스로의 허물을 들켜버리는 성마르게 어린 짐승에 불과했다. 그런 내게 스밀라는 난생 처음 보는 희귀한 종족이었다.
그럼에도 일말의 아름다움을 느꼈다면 바로 그 선명한 이질감에서 오는 충동적인 호기심이었을 터, 나는 스밀라를 곁눈질로만 탐색했다. 그러나 알다시피 곁눈질로는 사랑이 성사되지 않는다.
그건 되레 사랑을 모독하는 행위이다. 아울러 한 권의 소설을 곁눈질로만 읽는다는 건 이야기의 핵심과는 별 상관없이 글자들을 눈 밖으로 흘려 보낸다는 걸 뜻한다. 스밀라의 이야기를 곁눈질하며 내가 기대했던 건 꼬마 이사야의 죽음으로 드러나는 북유럽의 거대한 음모보다는 보일 듯 안 보이는 스밀라의 불확실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건 쏟아지는 눈송이들을 손바닥에 받는 것만큼 허무한 일이었다. 손바닥에 눈을 받으면 명확해지는 건 생명선과 제물선의 끝이 유독 흐릿한, 돈도 없고 명도 짧은 27살 청년의 불행한 손금뿐이었으니까.
그렇듯 나는 스밀라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없었다. 아니, 정면으로 보이는 그녀의 얼굴에서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건 결국 더 큰 환상 속에 그녀를 몰아넣고 나만의 스밀라를 그려 보이려는 얄팍한 욕구 때문이었다.
부담스러우면서도 곁눈질으로나마 한시라도 그녀 곁에 붙어 있으려던 나는 눈에 대해 특별한 감각이 있는 스밀라를 눈(雪)에서 떼어내 내 눈(眼) 속의 편협한 환상지대로 끌어들이려 했다. 그건 기하학적인 눈의 결정을 본따 개인적 환상의 소왕국을 꾸미려는 불가능한 욕망이었다.
그러나 스밀라를 눈에서 떼어내는 순간, 스밀라는 사라진다.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은 스밀라에 대한 눈의 감각이나 마찬가지다. 특정한 사물에 특별한 감각을 갖는다는 건 애초에 그 둘이 하나라는 걸 뜻하기 때문이다. 마치 사랑이 한 사람에 대한 특별한 감각에 의해 시작되고 완성되는 것처럼.
그런 의미에서 스밀라는 사랑의 완벽한 은유체계였지만, 동시에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금기의 泳岵潔駭? 어쨌거나 나는 스밀라의 입장에서 보건대 눈(雪)의 바깥에 있는, 눈(眼) 밖의 존재였을 따름이니까. 8년 전, 녹지 않는 눈 때문에 그 여름은 한층 더 무더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녀가 8년 만에 다시 내게로 왔다. 기대하지 않았기에, 누구에게도 잊혀진 그녀에 대한 기별을 듣지 못한 상태였기에, 이 조우는 더 놀랍고 특별해진다. 그러나 스밀라와의 해후가 각별하고 선명해지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스밀라를 다시 만나기 직전, 공교롭게도 나는 얼음처럼 차가우면서 빵처럼 부드러운 금자씨를 만났다.
스밀라가 먼 데 있는 미스터리한 존재라면 금자씨는 그 정겨운 이름만큼이나 대한민국에 널리 알려져 있던 여자였다. 그녀가 나타난다는 소문은 오래 전부터 많은 사람들의 기대감을 부풀렸다. 그리고 마침내 복수의 칼날을 싸늘하게 벼린 아리따운 금자씨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내 어머니뿐 아니라 8.15와 6.25를 겪은 대한민국의 많은 어머니들과 같은 돌림자를 쓰는 그녀는 세계의 많은 문헌들이 통상적으로 원용하고 있는 어머니상에 대한 가장 거친 초안 같은 인상이었다.
그만큼 금자씨는 (이름만큼)고전적인데다가 다소 촌스럽기도 하지만, 그 어떤 여자보다 명징하다. 그 명징함이 곧 금자씨의 특출한 아름다움이 되는데, 그 아름다움은 스밀라의 그것보다 더 차고 단단하게 얼어있다.
천상 부드러운 듯 새침하고 지혜로운 듯 이기적으로 보이는 이영애가 차갑고 시니컬하게 돌변한 데에서 그 예외적인 아름다움의 원인을 찾는 것도 틀리지는 않다. 영화에 관한 한, 배우의 이미지는 캐릭터의 성질을 감별하는 데 주요한 포인트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내가 만난 금자씨는 보기 드물게 냉철하고 명징하고 친절하기까지 한 여성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모든 매력은 오로지 복수심에 기인한다. 뜨겁지만 줄줄 흘러내리지 않고 단단하게 응결된 복수심은 선이 고운 금자씨의 얼굴에 지워지지 않는 기초화장처럼 뚜렷한 음영을 부여한다.
복수심은 금자씨의 아름다움을 받쳐주는 천연 분(粉)이자 존재의 지표이다. 내부로 오랫동안 삼켜진 눈물은 얼음이 되어 뜨겁게 흐물거리는 세상의 정념들 속에서 금자씨만의 시각과 판단을 관장하는 시계추로 작용한다. 그 얼음의 시간 속에서 금자씨는 비로소 세상 모든 사람들 앞에 친절해진다. 그 친절함은 금자씨가 스스로를 사랑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삶에 대한 금자씨의 기본 모토를 보여주는 대사가 있다. ‘너나 잘하세요’ 지독히 불친절하게 들리는 이 말은 그러나 유일무이하게 존재하는 삶의 지표를 향해 전 존재를 투신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가장 뻔뻔하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말이다. 아울러 그녀의 이름에서 ‘~씨’를 떼어내는 건 어울리지 않는다. ‘~씨’가 내포하고 있는 다소의 거리감과 모종의 경의가 없으면 금자씨는 개인적 정분에 사로잡힌 그저 그런 여자에 그치고 만다.
금자씨가 감옥에서 출소하는 건 고난의 종결이 아니라 고난의 새로운 시작일 뿐이다. 그런데 그 고난은 삶의 근거를 확인하는 즐거운 고난이기도 하다. 이때 즐겁다는 건 행복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인간은 결코 평화 속에서 행복할 수 없다. 진정한 평화란 고난과 희열이 반복운동하는 과정 속에서 자신만의 에너지를 항상적으로 유지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아주 잠깐 찾아오는 법이다. 따라서 금자씨의 복수는 더 잔혹하고 깔끔하며 한 치의 눈물도 없다. 금자씨가 아름다운 건 그 때문이다.
그녀는 ‘올드보이’의 오대수나 이우진처럼 정념의 감옥 안에 갇혀 있지 않고 정념과 나란히 간다. 그런 의미에서 박찬욱의 ‘복수 3부작’ 마지막 편이 감옥에서 출소하는 것으로 시작된다는 건 의미심장하다. 게다가 마지막 복수의 주인공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이다. 내가 아는 한, 남자들은 결코 자신의 정념 바깥에서 정념의 안을 들여다 보지 못한다.
그러나 어떤 여자들은 정념의 고삐를 쥔 채 빵을 굽거나 얼음의 속을 들여다 보는 것으로 자신의 삶을 완성한다. 그 삶을 맛보는 건 세상에 대한 자신만의 특별한 감각을 지닌 부류들의 몫이다. 금자씨는 그리하여 스밀라를 상상하는 내게 유일한 시각적 근거가 된다.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박현주 옮김, 마음산책)을 서점에서 발견하고 놀랄 수밖에 없었던 건 금자씨의 영상이 뇌리에서 채 지워지지 않았던 상태였기 때문이다.
자연 금자씨의 농밀하면서도 무감한 표정이 8년 전에 만났던 스밀라의 실루엣 위로 겹쳐졌다. 왠지 이번에는 그녀를 온전하게 이해하거나, 최소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자기 아이에 대한 죄의식과 세상에 대한 복수심을 잘 응결된 마음의 보석으로 갈고 닦은 금자씨가 ‘너나 잘하세요’라고 말했듯, 스밀라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내 반생을 뒤로 한 채, 여기 하얀 감방에 있는 지금도 다름없다. 내가 한번도 내 아이를 가져본 적이 없다고 해도 무슨 대수인가. 나는 창조론에 속아 넘어간 기분을 끊임없이 느끼지 않고서도 바다와 얼음을 즐길 수 있다. 태어난 아이는 찾아가야 할 것이고, 구해야 할 것이며, 별이고, 북극의 빛이고, 우주 에너지의 기둥이다. 그리고 죽은 아이는, 혐오해야만 하는 어떤 것이다.” - 페터 회,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중에서
이리하여 37살의 독신녀 스밀라는 오래도록 실패한 사랑의 유일한 원인과 결과가 되어 현재의 내 마음 속에 스민다. 스밀라를 받아들인 나는 이제 남은 여름을 에어컨 바람 없이도 서늘하고 건강하게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술과 커피마저 줄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스밀라가 수리공 페터의 커피를 경계하듯, 자기자신이 지니고 있는 또렷한 결정들을 일말의 취기 없이 명료하게 바라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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