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라는 것이 문득 서글퍼지는 때가 있다. 그 ‘때’란 어쩌면, 히스테리처럼 생의 어느 순간 불쑥 치미는 간헐적인 것이 아니라 요절하지 못한 모든 삶이 반드시 거쳐야 할 고갯마루 같은 것, 이르자면 삶의 새로운 국면이 시작되는 순간일지 모른다.
‘나이를 잊고 산다’는 투의 과시는 그래서 그 운명적 서글픔의 반어(反語)적 표현이고, 나이 듦의 자각을 일찌감치 품어버리는 일은 자학과 위악의 가장 노회한 방식일 것이다. 어쨌거나 그 대응들은 속절없어 가엽고, 가여워서 더 서글퍼지니, 나이란 가끔 체면이나 체신을 챙겨야 할 자리에서나 떠올릴 일이지 싶기도 한데, 알다시피 그건 참 어려운 일이다.
김인숙씨의 ‘그 여자의 자서전’(창비)은 그 나이의 고갯마루, 새로운 삶의 국면을 막 넘어선 이들의 근원적 서글픔을 품어주는 소설집이다. 작품 속 인물들이 인식하는 ‘나이’들을 보자. “아직 아무것도 버리지않고, 버린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몰랐던 때의 일이었을 것이다.
버리는 것은 버려지는 것이란 것, 타인으로부터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그런 생각은 언제나 슬픔을 동반한다.”(표제작) “그는, 잘못된 일을 복구하기에는 이미 늦어버린 나이에, 너무 멀리 뛰어버린 것인지도 몰랐다.
해피엔딩으로 끝날 새로운 스토리를 쓰기에는 늦어버린, 그런 나이 말이다.”(‘숨은 샘’) “재기가 어려운 것만큼이나, 타락하기도 어려운 나이야. 사실을 말하자면 양쪽 다 불가능하지”(‘감옥의 뜰’)
그들은 이렇게 묻는다. “그 시간들 속, 생에 대한 경멸조차도 속절없어져 버린, 그렇게 비굴해져 버린 나이를 너는 아니.”
‘지금-여기’ 그들의 삶이 어떠할 지는 짐작할 만하다. 그것은 지나쳐온 나이의 시간 속에 품었을 꿈과 희망과 기대들에 대비되는, 자기 자신과 타인에 의해 배반당한 삶들이다.
“잘 팔리는 책에는 관심 없”고 “애초부터 쓰고 싶은 글을 쓰기 위한 매문”이라 자위하며 속물의 삶을 각색하는 자서전 대필작가, 해피엔딩을 꿈꾸며 남들 데모할 때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언젠가 한번은 내 전부를 걸고 힘차게 뛰어볼 거”라던 해고근로자 출신의 보험외판원, 비루한 직장에 매달려 아등바등하는 남편과 “그를 이해하기 위해 애썼던 것은 그의 울분이 아니라 모욕과 비굴이었”던 아내…, 바다의 넓이도 모른 채 바다횡단에 나서는 나비처럼 “몸통이 없는데도, 팔과 다리는 계속 날갯짓을 해대”는 존재들.
그 서글픔과 환멸의 사연들은 숨막히다. 해도 세상이 버티는 것은, 삶이 모든 나이를 매달고도 지탱할 만큼 모진 것이기 때문일까.
보이는 것들의 차이란 “단지 삶을 견디는 방식의 차이일 뿐”(‘빨간 풍선’)이며, “모든 추한 꼴을 다 견디고 나서야 마침내 다가오는 생의 끝, 해피엔딩이란 어쩌면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고 그와 나는(우리는) 아직 그 끝까지 이르지 못했다는 것, 중요한 것은 그것”이기 때문일까.
“새들은 무리지어 지나가면서 이곳을 무덤으로 덮는다/ 관 뚜껑을 미는 힘으로 나는 하늘을 바라본다”(이성복 ‘아주 흐린 날의 기억’)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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