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에 인수ㆍ합병(M&A) 광풍이 불고 있다.
외환 위기 파고 속에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에 들어 갔거나 외국인의 손에 넘어 갔던 산업계와 금융계의 대표 기업들이 속속 정상화하면서 시장에 매물로 나오고 있는 것.
현금은 많지만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해 고민하던 재계도 신 성장 동력과 사업 다각화를 위해 사활을 걸고 인수전에 나서고 있다. 30조~50조원으로 추정되는 M&A 시장에서 누가 알짜기업들을 인수하느냐에 따라 관련업계는 물론 재계 전체의 판도가 뒤 바뀔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현재 매각 작업이 가시화하고 있는 알짜 기업들은 20여곳이나 된다. 먼저 옛 대우그룹 계열사가 눈에 띈다. 주로 자산관리공사나 산업은행이 대주주인 이들 기업들은 사실상 정부가 주인인 셈.
5년 안에 자금을 회수토록 하고 있는 자산관리공사법과 공적자금 회수의 목소리가 높아지며 올해와 내년에 매각 작업이 급류를 탈 전망이다. 옛 대우 계열사 중 지난해 매출액 기준으로 보면 대우인터내셔널이 5조172억원으로 가장 크다.
그러나 업계는 오히려 현금 보유액이 2조원이 넘는 것으로 알려진 대우조선해양(2004년 매출액 4조7,601억원)의 향방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삼성, 한진, 두산, STX, GS, 대성그룹 등이 군침을 흘리고 있다. 지난해 4조7,804억원의 매출액을 올린 대우건설도 올해말이나 내년 상반기 새 주인이 결정된다. 대우정밀의 경우 사업다각화에 부심해온 효성이 우선협상대상자로 낙점돼 실사 작업이 22일 시작됐다.
대우증권과 대우일렉트로닉스도 자산관리공사와 은행 채권단이 매각을 추진하고 있다. 특히 대우일렉트로닉스는 중국 가전업체 하이얼의 인수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옛 현대그룹 계열사중에도 대형 알짜들이 많다. 가장 관심을 끄는 기업은 국내 M&A 시장의 최대 매물로 꼽히는 하이닉스반도체. 지난해 매출액 4조6,461억원의 현대건설도 채권단의 주식 매각 제한 기간이 만료되는 연말 이후 매각이 추진될 것으로 보인다.
자동차 업계의 M&A 화두는 만도다. 대주주인 외국계 펀드 선세이지는 매각가로 2조원 안팎을 내걸고 11월 매각 우선협상대상자를 선정하겠다는 계획이며 현대차나 현대모비스의 참여 여부가 관전 포인트다.
한편 관심을 모았던 인천정유의 우선협상대상자엔 최근 SK㈜가 선정됐다. 내년 하반기 매각이 추진될 대한통운, 현재 법정관리 상태인 삼보컴퓨터도 관심을 끄는 매물이다. 정보기술(IT) 업계에선 SK텔레콤의 하나로통신 인수설과 KT의 다음 인수설도 끊이지 않고 있다.
금융계에서도 매물이 줄줄이 나오고 있다. LG카드 최대주주인 산업은행이 내달부터 본격적인 매각작업에 나설 것이라고 발표했고 외환은행도 대주주인 론스타의 주식 매각 제한이 풀리는 10월말이 가까워지면서 지분 매각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처럼 M&A 큰 장이 서면서 이들을 인수하기 위한 기업들의 발걸음도 바빠지고 있다. 특히 2010년 재계 5위 부상을 목표로 내세운 GS그룹과 국내 M&A 시장의 큰 손으로 부상한 군인공제회, 대한전선, 국내사모펀드 등의 움직임이 주목 받고 있다. 거간꾼 노릇을 할 투자 컨설팅 회사와 주간사 자리를 따내기 위한 각 증권사의 물밑 경쟁도 뜨겁다.
일각에선 채권단의 출자전환과 빚탕감 등으로 기력을 회복한 알짜 대형 매물들이 외국 자본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한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투자컨설팅사 인베스투스 박혁영 부장은 “초대형 알짜 기업들이 매물로 한꺼번에 나오고 있지만 이를 인수할 여력이 있는 국내 기업과 자본은 한정돼 있다”며 “최근에는 중국 자본이 우리나라 알짜 기업 인수전에 뛰어들고 있는 만큼 외환위기 당시 헐값 매각 및 기술 유출 논란이 재연되지 않도록 대책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이경상 대한상공회의소 기업정책팀장도 “국민들 혈세와 채권금융기관의 희생으로 건강해진 알짜 기업들이 외국계 투기성 자본에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자산 5조 이상 대기업의 워크아웃 기업 인수 등을 제한하고 있는 출자총액제한을 풀어줄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박일근 기자 ik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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