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과 아시아의 2차 대전 종전 기념식은 너무도 달랐다. 유럽에서는 독일의 기념식 참가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모든 당사자들이 나치의 패배를 해방의 새벽으로 축하한다. 반면 아시아에서 일본이 베이징, 서울, 평양 등에서 열리는 종전 기념식에 초대받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그 전쟁의 실체가 무엇이었느냐 하는 논쟁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오늘날 세계에서 일본만큼 역사와 영토 문제를 둘러싸고 이웃 나라들과 불화를 겪는 나라는 없을 것이다. 아시아에서 가장 활기찬 민주주의 국가인 한국에서는 국민의 90%가 일본을 신뢰하지 않는다. 중국에서는 적대감과 의구심이 널리 퍼져 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자리를 차지하려는 2005년도 일본의 야심은 인접 국가들만 반대한 것이 아니다. 그토록 많은 원조를 쏟아 부은 아프리카연합(AU) 53개 회원국과 미국도 반대했다.
●기념식 초대받은 독일과 대비
지난 60년을 되돌아볼 때 두 가지 문제가 두드러진다. 일본의 전쟁 책임 문제는 결코 만족스럽게 해결된 적이 없다. 그리고 일본의 정체성과 방향은 일본을 내내 미국의 종속 요소로 묶어두고 아시아로부터 단절시킨 미국의 전후 처리 방식 때문에 갈피를 잡지 못했다.
‘도쿄 전범 재판’은 전쟁 책임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고, 일본 내에서도 정당성을 거의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일본인들은 대부분 그것을 ‘승자의 정의’로 본다. 처벌 기준도 제멋대로였다. 전쟁을 수행한 최고지도자인 히로히토 천황은 미국의 점령 정책에 협력하는 대가로 전쟁 책임이 면제됐다.
생체실험을 한 731부대의 범죄행위는 고의적으로 묵살됐다. A급 전범 가운데 일부만 처형됐고 남은 자들은 풀려났다. 기시 노부스케는 전후에 총리까지 됐다.
이러한 전반적인 결함과 함께 도쿄 및 여타 도시들, 특히 히로시마와 나가사키가 완전히 파괴됐기 때문에 일본은 전후까지도 계속해서 자신들이 피해자라는 인식을 깊게 간직했다.
지금까지 그 어떤 일본 법정도 1931~45년에 천황의 이름으로 일본군이 저지른 그 어떤 행위에 대해서도 기소하거나 처벌한 적이 없다. 중국과 여타 지역에서 무수한 잔혹한 짓을 저지른 책임자들은 현재 일본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다. 반면 유럽이나 여타 지역에서 똑 같은 짓을 한 자들은 죽는 날까지 추적당한다.
일본 사회에서 미해결의 전쟁 책임 문제를 거론한 유일한 시도는 2000년 11월 한 시민 법정(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만을 다룸)에서였다. 천황과 기타 인사들에 대해 “유죄” 판결이 나자 엄청난 소동이 벌어졌다. 일본이 형식적이나마 전쟁 책임을 인정하는 법률적 틀은 전범재판들-아무리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에 토대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1951년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서 전범재판의 구속력을 인정했다. 그러나 오늘날 일본의 일부 영향력 있는 인사들은 당시 전쟁이 아시아 해방이라는 이상을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하며 이 조약을 부인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들은 역사교과서도 다시 쓰고 헌법도 개정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과거사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서 일본의 향후 역할에 대해서도 첨예한 대립이 존재한다. 미국 추종에 절대적인 우선순위를 두어 온 일본 관료들은 계속 그렇게 할 것인지, 아니면 부상 중인 ‘동아시아 공동체’에 적극 참여할 것인지를 놓고 분열돼 있다. 심지어 저명한 원로 정치인의 한 사람(고토다 마사하루 전 부총리)조차 일본을 미국의 “속국”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과거 반성없이 美지향 일변도
얼마나 많은 8ㆍ15 기념식을 더 치러야 일본이 난징, 서울, 평양, 싱가포르에서 열리는 기념 행사에 참가하는 것이 당연스럽게 여겨지게 될까? 일본은 과거에 대한 공통의 이해를 공유하게 되어야만 아시아의 미래를 건설하는 데 있어 이웃 나라들과 함께 충분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개번 맥코맥 호주국립대 아ㆍ태역사학과 교수
정리=김명수 기자 lecer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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