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퇴임하는 김우식 청와대 비서실장은 고별 기자회견에서 “밉든 곱든 대통령은 나라의 최고지도자이니 대통령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신바람 나게 일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말했다. 그는 또 “지금처럼 분쟁과 갈등과 불화가 소용돌이쳐서는 안된다. 언론이 통합과 협력의 무드를 조성해 달라”고 당부했다.
기막힌 소리다. ‘밉든 곱든 대통령은 최고지도자’라는 말이 비서실장의 입에서 나올 만큼 대통령에 대한 여론이 악화하고, 갈등이 위기 수준임을 말해 준다.
이런 식의 말은 노무현 대통령의 입에서도 나왔다. 그는 “차라리 식물대통령이 되고 싶은 심정”이라고 말했다. ‘국가 권력 남용 범죄에 대한 시효 배제’를 주장한 자신의 8ㆍ15 경축사가 곧장 위헌 시비로 이어지자 비서관 회의에서 쏟아놓은 한탄이다. 대통령이 무슨 말을 하면 진심을 헤아리지 않고 비판만 하니 어떻게 말을 하고 일을 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한탄을 해야 할 사람은 대통령이 아니라 국민이다. 국민은 시간이 갈수록 노 대통령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취임 후 2년 반이 지나가는 동안 대통령의 언행을 점점 더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가장 이해하기 힘든 부분은 폭탄 선언 내지 돌출 발언이다. 대통령은 그 말이 한평생의 신념에서 나왔고, 오래 심사숙고한 것이며, 다른 정치적 계산이 없다고 강변하지만 국민은 황당할 때가 많다. 여당에서도 황당하다는 반응이 나오고 참모들도 대통령의 진의를 몰라 우왕좌왕하기 일쑤다.
폭탄 선언을 했다가 반대가 심하면 한발 물러서고, 물러섰다 싶으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주장하고, 또 사태가 불리해지면 한발 물러섰다가 다시 주장하는 것이 노 대통령의 방식이다. 그런 일이 거듭되는 가장 큰 이유는 참모나 해당 부처와 충분히 검토하지 않은 채 자신의 생각을 불쑥 내놓기 때문이다.
혼자의 생각은 아무리 한평생의 신념이라 해도 현실적으로 문제가 있거나 설익은 경우가 많다. 대통령이 국민을 상대로 설익은 주장을 해서는 안된다. 한번도 곤란한데 그런 일이 거듭되면 국정이 혼란에 빠지고 대통령의 위상이 추락할 수밖에 없다.
대연정 제안이나 시효 배제론이 대표적인 예다. 대연정 제안에 대해 위헌론이 제기되자 노 대통령은 “내가 원하는 것은 선거제도 개혁이지 연정이 아니다”라고 한발 물러섰지만, 계속 연정론을 주장하고 있다. 시효 배제론에 대해서도 위헌론이 일자 “소급 처벌하자는 것은 아니다”라고 물러섰지만, 반대 여론에 대한 유감을 감추지 않고 있다.
옛 안기부 도청 문제로 인한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갈등에서도 불신을 불렀다. 김대중 정권에서도 도청이 있었다는 발표에 대한 김 전 대통령 측의 거센 반발, 김 전 대통령의 입원, 이에 따른 호남 민심의 동요가 이어지자 노 대통령과 여당은 민망할 정도로 김대중 변호에 나섰다.
지역구도 타파를 위해 한나라당에 정권을 이양하는 대연정을 제안했던 대통령이 호남 민심을 지키려고 진땀 흘리는 모습은 코미디에 가까웠다. 노 대통령도 김 전 대통령도 큰 처신을 하지 못하고 정치적 이해득실에 매달리는 모습은 실망스러웠다.
노 대통령과 국민의 관계는 개선의 실마리를 찾기 힘들 만큼 심한 교착상태에 빠졌다. 국민은 대통령의 행태를 이해하지 못하고, 대통령은 자신에 대한 비판의 핵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비판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받아들일 생각이 없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받은 주장을 거듭 내세우고, 집착한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 반대의견을 폈던 사람들은 냉소적이 되고, 다시 비판할 의욕을 잃게 된다. 그렇게 되면 대통령의 어떤 말에도 무관심해지는 최악의 상태가 온다.
“대통령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달라”는 비서실장의 말은 순서가 틀렸다. 대통령이 먼저 국민에게 용기를 줘야 한다. 경제불황과 대형 사건들 속에서 지칠 대로 지친 국민에게 신바람을 불어넣어줘야 할 사람은 바로 대통령이다.
그 다음에 국민이 “대통령 힘내세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상태로는 어렵다. 7월 말엔 대연정론으로, 광복절엔 시효 배제론으로 위헌 시비를 부르는 대통령을 어떻게 응원하겠는가. 국민의 격려를 받으려면 대통령이 먼저 변해야 한다
한국일보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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