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기록을 작성할 때 ‘존경하는 인물’이라는 난이 있다. 이 칸 앞에 이르면 거북스럽다. 말은 점잖지만 ‘너는 어떤 생각이나 사상을 지닌 인간이냐’고 내면고백을 강요 받는 듯하다. 안 쓰자니 오만하거나 용렬한 인간처럼 보일 터이고, 쓰자니 위인에 대한 모독이거나 과대망상증 환자처럼 보일까 봐 난감한 것이다.
입대 후 장고(長考) 끝에 ‘사르트르’라고 적어 넣었다. 카드 검색자들이 이 프랑스 철학자를 소상히 알지 못할 것도 같아 편리해 보였다. 지금도 그를 써 넣는다. 사실 그에 대한 나의 존경은 여전하다.
△ 서글픈 것은 국내에서 떠오르는 인물이 없었다는 점이다. 지금은 동시대인 몇 분을 꼽게 되지만, 당시 떠오르는 이는 옛 위인 뿐이었다. 지금 ‘X파일’로 인해 존경 대상이 될 듯한 전직 대통령들의 명예가 진창에 처박히고 있다. 애석한 면도 있지만, 늦게라도 사실이 드러나는 것은 진실을 추구하는 이들이 엄존하기 때문이다.
‘진실만이 최후의 승리자가 된다’는 문장이 인용된 ‘김영삼 대통령 회고록’이 있다. 그 하권의 ‘전두환 구속’(149쪽) 부분의 네 쪽만 읽어도, 참으로 가당치도 않았던 지난날 우리 대통령들의 행태가 한눈에 들어온다.
△ 거기에는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동시에 구속되는 세계 초유의 사태 발생, 세계 언론들의 대대적인 보도, 유독 김대중씨만은 이해할 수 없는 언행을 보인 것 등이 기록돼 있다.
5ㆍ18 진상규명을 주장했던 DJ의 태도가 그때 돌변해 이 사건을 ‘깜짝 쇼’로 규정했다는 것이다. YS는 ‘그의 부도덕하고 이중적인 정치행태가 다시 한 번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고 비난하고 있다.
△ ‘X파일’에 대한 정치적 책임 외에도 박철언씨 회고록이 다시 한번 국민을 경악시키고 있다. YS가 1990년 3당 합당 무렵 노태우씨 쪽으로부터 40억원의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내용이다. 어찌 보면 하늘은 전직 대통령들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고 있나 보다.
불법행위와 비리를 스스로 밝혀 최소한의 명예라도 건지고, 국민의 배신감도 덜어주었으면 한다. 그런 대통령이 있다면 사르트르 대신 그의 이름을 써넣고 싶다. 최규하씨가 대표적인 예지만, 진실을 밝혀야 할 때 침묵하는 것은 불의와 협력하는 것이다.
박래부 수석논설위원 parkrb@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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