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벤야민(1892~1940)의 삶은 불행했다. 살아 있는 동안 학문적으로 인정 받지 못했던 그는 나치의 위험을 피해 파리에서 스페인으로 피신하던 중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벤야민은 현재 그 누구보다 행복한 ‘이후 삶’을 누리고 있다. 그는 가장 많이 인용되고 연구되는 사상가 중 한 명이다. 벤야민의 글은 여전히 ‘현재성’으로 가득 차 있다.
벤야민은 독일 베를린에서 태어나서 성장했으며, 유럽의 여러 도시들을 여행했고, 마지막 삶을 그가 “19세기의 세계 수도”라 불렀던 파리에서 보냈다. 벤야민은 열정적으로 도시에 관해 글을 썼다.
그는 베를린에게 ‘일방통행로’와 ‘베를린의 유년시절’이라는 책을 헌정했고, 모스크바 여행을 통해 ‘모스크바 일기’를 남겼다. 하지만 많은 연구자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벤야민이 가장 애착을 가졌던 도시는 파리다.
그는 파리에 대한 관상학적 연구를 통해 자신이 평생 몰두했던 모든 주제를 완성하려는 야심 찬 계획을 갖고 있었다. 벤야민의 이러한 계획이 이른바 ‘파사쥬(아케이드) 프로젝트’이다.
하지만 벤야민은 이 프로젝트를 완성하지 못한 채 사망했다. 대신 그는 파리에 관한 엄청난 분량의 메모를 남겼다. 벤야민이 파사쥬 프로젝트에 관한 유고를 남겼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고 난 후, 사람들은 벤야민의 유고 출간을 고대했다.
난해하기로 유명한 벤야민을 해독할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가 파리 연구 원고더미 속에 있지 않을까 기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고가 1982년 벤야민 전집 제5권 ‘파사젠베르크’(한국어 번역 제목 ‘아케이드 프로젝트’)로 출판되어 세상에 선보였을 때, 이 파리연구 모음집을 보고 사람들은 당황했다. 책이 기대와는 달리 체계를 갖춘 완성된 연구서가 아니라, 독일어와 프랑스어로 된 엄청난 분량의 원고를 주제어에 따라 분류한 자료 모음집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 책은 독자들의 적극적인 해석 없이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 ‘벙어리’에 가깝다. 벤야민은 파리 연구를 위한 재료만을 남겼다. 독자들은 그 재료를 갖고 벤야민이 완성하지 못했던 건축물을 지어야 한다. 그렇기에 벤야민의 미완성 저작은 독자들의 창조적인 해석에 따라 보물도 될 수 있고, 그저 두꺼운 자료 모음집에 불과할 수도 있다.
독일어와 프랑스어를 모르는 한국의 독자들이 전혀 접근할 수 없었던 이 책이 한국어로 번역되었다. 한국어 번역은 ‘사건’이다. 하지만 이 ‘번역 사건’은 마냥 즐거운 소식만은 아니다. 번역에서 발견되는 몇 가지 문제점 때문이다.
번역판은 먼저 독일어와 프랑스어를 한국어로 옮기는 정확성 면에서 문제점을 드러낸다. 한국어 번역자는 일러두기에서 독일어판과 더불어 프랑스어판, 영어판, 일본판을 참조했다고 밝히고 있다.
일본어판을 참조한 영향 때문인지, 번역서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본식 한자가 등장한다. 독일어판 묶음 A만을 대조했을 뿐인데, 오역들이 발견된다. 예를 들어 묶음 12, 4에서는 벤야민의 중요한 방법론인 관상학(Physiognomie)이란 단어가 아예 빠져있다.
한국어 번역판은 텍스트 편집에서도 문제점을 드러낸다. 이 저작은 벤야민이 직접 쓴 논평과 연구를 위해 모아둔 직접 쓰지 않은 자료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번역판은 상이한 성격을 지닌 이 두 가지 텍스트를 확연하게 구별되지 않도록 편집하였다. 벤야민의 유고집이 일반 독자를 위한 파리 연구서라기 보다 전문 연구자를 위한 자료 모음이기에 세심한 편집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한국어 번역판에는 ‘용어 해제’라는 납득하기 힘든 제목으로 벤야민이 사용한 중요한 개념의 독일어, 프랑스어, 한국어 대조표를 실어 놓았다. 이는 과잉 친절일 뿐만 아니라 위험한 시도이기도 하다.
‘용어해제’를 통해 벤야민의 고유한 언어에 대한 한국어 표준 번역을 제시하고 싶었다면, 번역자는 번역어를 선정할 때 한국에서 벤야민을 번역하기 위해 노력했던 많은 학자들의 연구를 참고해야 했다.
노명우 미디어문화연구소장ㆍ독일 베를린대 박사
▲ 아케이트 프로젝트는
산업사회의 물신성·집단무의식 분석
베를린, 모스크바, 그리고 파리에서 19세기 자본주의 도시의 풍속과 그 속에 담긴 집단무의식, 물신(物神)적 성격을 읽어내려 했던 발터 벤야민의 작업은 익히 알려진 것이지만, 명성만큼 그의 원전이나 해설서가 국내에 널리 소개되지는 않았다.
이번 '아케이드 프로젝트' 완역은 시도만으로도 높이 평가 받을만하다. 벤야민은 요즘은 흔한 도시 연구의 장을 연 선구적인 모더니스트라고 할 수 있다.
그는 19세기 말 세계의 수도라고 불린 파리의 회랑식 상가(아케이드)를 배회하는 만보객, 창녀, 그리고 소비와 산업 테크놀로지를 대변하는 백화점과 만국박람회의 인파 속에서 상품의 물신적 성격을 읽어내고, 미시적인 관찰을 통해 다중의 집단 무의식을 독창적으로 분석해낸다.
이 저작은 파리 국립 도서관의 수많은 사료와 이미지를 토대로 작성한 메모와 인용문의 연속으로, 마치 백과사전을 방불케 하는 방대한 두 권의 묶음이다. 이번에 우리말로 번역된 책은 그 중 첫 묶음이며, 나머지는 11월 출간 예정이다.
또 하나 눈여겨 볼 것은 도서출판 길이 출간 준비 중인 10권 짜리 벤야민 선집이다. 이화여대 최성만 교수, 김영옥 여성학연구원 연구원, 심혜련 강사, 가톨릭대 윤미애 교수 등 독문학자와 황현산 고려대 불문학과 교수가 번역자로 참여해 올해 말이나 늦어도 내년 2월까지 '일방통행로와 사유이미지' '보들레르와 현대' '이미지와 매체' 등 첫 3권을 선보인다.
한양대 반성완 교수가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을 소개한 이후 20년이 넘도록 벤야민 책 번역이 전무하다시피 했으니 국내 연구자들이 '아케이드 프로젝트'와 벤야민 선집에 반색하는 것도 이유가 있다.
벤야민 소개서로는 지난해 번역되어 나온 수잔 벅 모스(미국의 프랑크푸르트학파 연구자)의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문학동네 발행ㆍ김정아 옮김)가 완성도 높은 저작으로 평가 받고 있다.
올해 초 나온 그램 질로크 영국 샐퍼드대 교수의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효형출판ㆍ노명우) 역시 벤야민의 도시 연구를 종합해 소개한 역작이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