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훈(63) 대법원장 후보자는 1999년 최종영 현 대법원장이 지명될 당시에도 막판까지 경합을 벌였을 정도로 일찌감치 원장 물망에 올랐던 인물이다. 법조계 안팎에서는 법 이론과 실무재판 능력이 탁월한 원칙론자라는 평가가 많다.
새옹지마 인생역정 그는 85년 고법 부장판사 승진 전까지 ‘인사 때마다 물먹는’ 인재였다. 유신 초기인 72년 의정부지원 판사 시절 시국사건 피고인에게 징역 2년 이상을 선고하라는 정권의 주문을 어기고 선고 때까지 구속 기간인 징역 6월을 선고해 석방한 것 때문에 미운 털이 박혔었다는 게 정설이다. 이후 80년대 5·6공 시절까지 그는 거의 민사재판부로만 돌았다.
김영삼 정부 들어 이런 과거 경력은 오히려 승승장구의 발판이 됐다. 93년 서울 서부지원장에서 대법관행 지름길로 통하는 법원행정처 차장으로 전격 발탁됐고, 불과 9개월 만인 94년 대법관에 올랐다. 대법관 서열 9위였던 98년에는 통상 수석 대법관이 맡던 중앙선관위원장에 임명됐다. 99년 대법원장 지명 직전까지 갔다가 정치권의 호남 배제론에 밀려 낙마했다는 설이 유력했다.
사법개혁 주도 그는 사법부 개혁에 적극적이었다. 93년 서부지원장 시절 전국 법원장 회의에서 소장판사들의 요구를 담아 ▦검찰과의 대화통로 역할을 하는 지법 수석부장제 폐지 ▦법관징계제도 활성화 등의 개혁안을 건의했다.
그 해 ‘3차 사법파동’은 이런 제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소장판사들이 집단 건의문을 발표하면서 촉발됐다. 당시 일선 판사들의 핵심 요구사항이 대법원장의 인사독점을 개혁하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이 후보자가 향후 대법관 구성을 비롯한 법관 인사에서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주목된다.
법원행정처 차장 시절 사법제도발전위원회의 주무 위원으로 사법개혁안 입법을 추진했던 경험도 사법개혁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풀어나갈 대법원장으로서 장점으로 평가된다.
그는 소신과 원칙에 따른 판결을 많이 남겼다. 97년 12·12 및 5·18사건 판결에서 시민군의 광주교도소 공격을 폭동으로 규정한 다수의견에 반대하는 등 대법관들 중 가장 많은 4건의 소수의견을 냈다.
공무원이 민원을 적법하게 처리한 뒤 사례금을 받았더라도 해임할 수 있다고 판결, 뇌물수수에 대해 엄격한 기준을 제시하기도 했다.
환자가 치료도중 숨졌을 경우 사망원인을 입증할 책임이 의사에게 있다는 새 판례도 남겨 의료사고에서 약자인 환자쪽에 섰다. 노조전임자에게는 무노동 무임금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한 판결에선 친 노동자적 시각도 엿보인다.
하지만 국가보안법 해석과 여성관련 판결에선 보수적인 색채를 분명히 드러내기도 했다. 그는 이적단체 구성원 사이의 내부토론도 처벌할 수 있다고 국가보안법을 폭 넓게 해석했고, 황혼이혼 소송에서 이혼사유를 엄격히 제한해 이혼을 불허하기도 했다.
최대공약수 인선 노무현 대통령이 이 후보자를 지명한 것은 그가 특별한 정치색 없이 개혁과 보수를 아우를 수 있는 ‘최대공약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실제 그는 최근 대한변협, 시민단체 등에서 발표한 후보군에 고루 포함됐었다. 하지만 국정원장 법무장관 검찰총장에 이어 대법원장까지 모두 호남 출신 인사가 포진된 점은 ‘지역 편중인사’ 시비를 부를 가능성도 있다.
그는 이날 지명발표 직후 가진 인터뷰에서 “사법부 요직 인사를 출신지역 문제로 시비삼는 건 곤란하다”라며 “최종 임명되면 국민이 사법부에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술을 입에 대지 않으며 배석판사들과의 합의과정이 지나칠 정도로 깐깐해 빠지면 헤어나기 어렵다는 뜻에서 골프용어인 ‘벙커’라는 별명이 붙어있다.
김용식 기자 jawoh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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