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하고 싶다는 것은 잃어버린 무언가를 되찾고자 하는 시도다.(55쪽)…이해는 언제나 비언어적이다. 무엇이 낯선 것인지 이해하게 되는 순간, 설명하려는 충동을 잃어버린다. 현상을 설명하는 것은 그 현상과 거리를 두는 것이다.(259쪽)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은 그 같은 언어 이전의, 이면의, 근원적인 ‘이해’에 관한 소설이다. 그 방법론이자, 극히 아름다우면서도 드물게 모범적인 사례다.
스밀라 야스페르센. 그린란드의 이누이트족 사냥꾼 어머니와 덴마크 의사 아버지 사이에 태어난 37살 쌍둥이자리 독신녀. 유년시절을 그린란드 카나크의 눈과 얼음 속에서 자라다, 어머니의 실종 이후 아버지를 따라 덴마크로 이주, 수학과 지리를 공부한다.
그는 광활한 빙하의 영토와 잃어버린 반쪽 모국의 언어를 사무치게 그리워한다. “내가 공간적 자유에 대해 느끼는 방식은 내가 아는 바 남자들이 자기 남근에 대해 느끼는 방식과 같다. 나는 공간적 자유를 아이처럼 안고 있으며 여신처럼 숭배하고 있다.”
그는 고독하고 대체로 우울하다. 그가 우울을 극복하는 방식은 대체로 이렇다. “구세주 교회에서 바흐의 오르간 작품을 들을 수도 있다…. 도움을 청할 수도 있다.
예를 들자면, 전화를 걸어 누가 귀를 기울여줄지 알아보는 것이다. 이런 건 유럽식 방법이다. 행동을 통해 문제에서 빠져 나올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은. 나는 그린란드식 방법을 취한다. 그것은 어두운 분위기에 침잠하는 방식이다. 내 패배를 현미경 아래에 올려놓고 그 모양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으로.”(147쪽)
눈은, 얼음은, 수학은, 그에게 진정한 행복의 매개물이다. “눈(雪)을 읽는 것은 음악을 듣는 것과 같다. 눈에서 읽은 내용을 묘사하는 것은 음악을 글로 설명하려는 것과 같다.”(64쪽) 그의 눈에 대한 감각은 유년의 교육과 그 상실과 슬픔에 닿아있는 깊은 그리움에 연유한다.
그는 결이 고운 가루눈 ‘카니크’와 그냥 가벼운 눈 ‘피르후크’를 구분하는 눈(眼)을 지녔고, 눈의 흔적만으로 사라진 시간 속 움직임의 모든 비의를 찾아내는 감각을 지녔다. 그것은 “일생을 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얻게 되는 “고도로 특화된 흥미” 같은 것이다.(169쪽)
이 작품의 서사는 추리소설의 얼개로 전개된다. 스밀라의 영적 친구로 그와 한 건물에 사는 소년 이사야의 돌연한 죽음, 그 죽음에 얽힌 비밀을 추적하는 과정의 이야기다. 허영, 탐욕, 적개심이라는 추악한 문명의 그늘이 ‘니플하임(‘안개의 땅’이라는 뜻으로 북유럽신화에 나오는 얼음과 추위의 땅)이라는 웅장한 신화와 자연의 세계에 드리워진다.
스크루드라이버로 악인의 몸을 찌를 줄도, 짧은 키스로도 ‘내 온몸을 입 속에’ 담을 줄도 아는 여자, 스밀라가 감각과 사유로 그 수수께끼를 풀어낸다. 문명과 자연의 대비, 사랑과 증오의 대립, 차가움과 따뜻함의 조화는 웅장하고 조밀하며 다감하다.
스밀라의, 사건을 향한 집념의 뿌리는 물론 사랑이다. 그 사랑은 말처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역시 ‘문명의 유럽인’들처럼 “언제나 모순적인 진실보다는 간단한 거짓말을 선호”(455쪽)하고, “부담스러운 진실을 대면하기보다는 제한된 정보만 가지고 편안히 있는 쪽을 택”(564쪽)하며 살아가기 때문일 것이다. 스밀라를 만난 것은, 이 여름, 사랑처럼, 작은 위안이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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