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안기부 도청 문제가 나라 전체를 의혹과 혼란의 구덩이로 몰아넣었지만, 대화나 전화의 도청 자체는 기술적 측면에서는 매우 원시적인 오프라인 방식에 불과하다. 정보통신기술의 눈부신 발전은 감시와 추적, 해킹 등을 통한 사생활 침해능력의 현저한 향상을 수반했다. 과거에는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위험 요인들이 속속 현실화되고 있고 부지불식간에 새로운 기술과 장치들이 개발되어 개인의 사생활을 24시간 간단없이 위협하고 있다.
그 동안 논란이 되었던 휴대폰 도청도 단순한 기술적 가능성을 넘어서 이미 현실화되고 있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발신자 추적이나 위치 추적은 이미 일상화 된지 오래고, 맘만 먹으면 누구나 언제라도 타인의 이메일이나 온라인 채팅 내용을 해킹할 수 있는 단계에 와 있다.
영국의 보통 시민들이 매일 300번 이상 폐쇄회로TV(CCTV) 촬영을 당한다는 통계는 이미 낡은 것이다. 이를 실증이나 하듯, 지난번 런던 테러 당시 당국은 곳곳에 설치된 폐쇄회로 카메라의 녹화기록을 조사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홈뱅킹 시스템을 해킹하다 체포된 한 벨기에 해커에 따르면 홈뱅킹 절도는 ‘문 열린 상점을 터는 것만큼이나 쉬운 어린애 장난’에 불과하다.
우리나라에서도 은행, 금전자동인출기 설치장소, 일부 지방자치단체 등에서 감시카메라가 사용되고 있지만, 그런 재래식 감시기술 자체는 ‘미림팀의 도청사건’이 주는 이미지처럼 이미 낡은 것이고 또 그 유해성도 생각만큼 심각하지 않다고도 할 수 있다. 상상을 초월하는 정교하고 다양한 감시, 기록, 추적 및 해킹 기술과 장비들이 경쟁적으로 사생활과 비밀 사냥에 동원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인터넷 침투율 선두를 달리는 우리나라는 상황이 더욱 심각하다. 인터넷 접속 시간이 길어지면 길수록 노출의 범위와 강도도 그만큼 커진다.
‘u-시티’니 ‘u-워크’니 하며 유비쿼터스 컴퓨팅 기술을 응용한 분야가 확산될수록 사생활과 비밀의 안전에 대한 위협도 커질 수밖에 없다. RFID 기술과 유비쿼터스 센서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장소나 장치에 구애받지 않고서 자유롭게, 이른바 ‘5-Any’, 즉 어디서나(Anywhere), 언제나(Anytime), 어느 장소(Anyplace), 어느 장치(Anydevice), 어느 네트워크로나(Anynetwork) 원하는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유비쿼터스 사회의 비전은 가슴을 설레게 하지만, 사생활과 비밀의 보호라는 관점에서는 악몽의 전조일 수도 있다.
프라이버시와 개인정보 보호의 사회문화적 인프라가 상대적으로 매우 취약한 우리나라의 경우 유비쿼터스의 위협은 훨씬 더 심각하게 다가올 것이다. 유명연예인의 스캔들을 넘어 이제 보통 사람들의 부부생활까지 넘보게 된 ‘몰카 동영상’이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곳, ‘개똥녀’니 ‘왕따 가해자’니 하며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사이버 집단 따돌림으로 마구 짓밟는 일이 벌어지는 곳, 이런 나라에서 유비쿼터스의 멋진 신세계만을 상상하는 것은 천진난만한 일이다.
정보화 전부터 사생활보호를 위한 법제도적 인프라와 문화적 토양이 극히 척박했던 데다 세계 첨단의 정보통신 기반을 구축하면서도 문제를 소홀히 한 탓에 프라이버시와 개인정보 보호의 수준은 낙후를 면치 못하고 있다. 이번 도청사건을 계기로 통신비밀보호법의 공백과 약점을 입법적으로 보완해야 한다는 주장이 공감을 얻은 것은 지당한 일이지만, 우여곡절 끝에 국회에 상정된 개인정보보호법의 제정을 서두르는 것이 무엇보다도 시급하다.
이 법은 유비쿼터스 정보사회의 권리장전이다. 프라이버시 없인 정부도 없다는 각오가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한 시점이다. 사생활과 개인정보가 보호되는,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드는 일은 이제 경제건설이나 민주화 못지않은,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한 역사적 과제가 되었다.
홍준형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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