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안기부 X파일 이후 우리 사회는 몸살을 앓고 있다. 그 동안 온갖 짐작과 추측은 난무했지만, 국가정보기관이 스스로 불법도청사실을 고백하는 순간 충격은 쓰나미처럼 엄습했다. 적어도 일관되게 도청사실을 부인해 온 정보기관이 국민의 세금으로 국민을 불법 도청했음을 스스로 밝힌 것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불법도청이 중앙정보부, 안전기획부 시절에 이루어졌는지, 국가정보원 시절(1999년 이후)에 이루어졌는지는 별 주의를 끌지 못했다. 국회정보위원회가 신설되고(1994년), 국정원장에 대한 인사청문회가 시행되었으며(2003년), 대공정책실이 활동을 중단하는 등(2003년) 나름의 개혁조치는 기억에서조차 사라졌다. 오로지 국민들은 국가권력의 부도덕성과 발가벗겨진 거짓의 실체에 전율할 뿐이었다.
당연히 비난여론이 비등했다. 해외정보처, 대통령 직속 국가정보위원회 신설론에서부터 국정원이 당장 문을 닫아야 한다는 극약처방까지 다양한 개혁안이 쏟아져 나왔다. 누구도 국정원을 그대로 두자고는 하지 않는다. 이번에야 말로 국정원을 개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하늘을 찌른다. 그러는 와중에 국정원 직원들은 이번 사태로 인해 초래된 극심한 사기저하와 조직전체의 침체를 호소하고 있다.
이제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냉정하게 판단해야 한다는 지적도 들린다. 신중론이다. 섣부르게 국정원 개혁에 나선다면 오히려 국가경쟁력을 좀먹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일리 있는 이야기다. 냉전이 종식된 이후 경제ㆍ환경ㆍ에너지 등 모든 분야에서 정보전쟁이 더욱 첨예해지고 치열해지고 있으며, 무한경쟁의 국제화시대에 국가정보기관의 경쟁력 강화는 국익을 위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정보기관의 개혁논의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정보기관의 경쟁력 강화’라는 미명하에 국정원 개혁을 미루는 것은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독재정권을 위해 창설되었다는 태생적 한계는 차치하더라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정보기관의 수사권 보유가 40여 년째 이어져오고 있다.
밀행성을 생명으로 하는 정보기관은 적법절차를 요하는 수사권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최소한의 상식조차 무시되어온 것이다. 정보기관이 국내정치에 관여할 수 없도록 국내정보수집권한을 폐지 또는 제한하고, 보안정보에 대한 기획조정권한도 폐지해야 한다는 지적도 기회 있을 때마다 제기되었지만, 국정원과 정치권에게는 마이동풍이었다.
정치권은 더 나아가 국회에 의한 국정원 통제를 스스로 포기했을 뿐 아니라 민간정보전문가가 참여하는 국정원 통제감시의 틀도 마련하자는 제안을 번번이 무시하기 일쑤였다.
더욱 심각한 것은 정보기관 자신의 태도이다. 안기부, 국정원은 개혁에 협력하기는커녕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격렬히 저항해왔다. 김영삼 정부시절 안기부는 정보기관 개혁차원에서 삭제된 일부 수사권을 찾아오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고 그 결과는 안기부법 날치기통과로 나타났다.
국민의 정부 시절에는 대통령의 지시조차 무시하고 불법도청을 지속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참여정부 들어서도 국정원은 국내사찰정보 수집에 종사했던 직원들의 구조조정에 대비해 인권ㆍ시민단체들의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테러방지법 입법작업을 주도해왔다.
국가정보원과 그 구성원들의 공과를 무시하고, 그들을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것은 매우 부당한 일이다. 국가정보원은 국가와 국민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탈권력화, 탈정치화라는 지상과제 실현을 위해 국정원은 먼저 과감하게 기득권을 버려야 한다. 정치권도 눈치만 보지말고 이제야말로 국민의 뜻을 제대로 대변해야 할 때이다. 그것만이 국정원 개혁을 성공시키기 위한 전제 조건이고, 순수 정보기관으로 재탄생하길 바라는 국민적 염원에 부응하는 길이다.
장유식 변호사ㆍ참여연대 협동사무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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