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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zine Free/ 음식 - 박재은의 음식이야기 - 밥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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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zine Free/ 음식 - 박재은의 음식이야기 - 밥심

입력
2005.08.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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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운 날씨 끝에 비가 내린 엊그제, 일은 많고 길은 밀리니 짜증이 났다.

강남역에서 신사역까지 그저 쭉 달리면 그만일 거리인데, 갑자기 쏟아진 폭우탓에 40분 가까이나 걸렸다. 신사역에 내리니 시간은 저녁 8시 40분. 나를 기다리느라 덩달아 짜증이 나 있던 남편과 함께 골목 속 생선구이 집에 들어섰다.

배가 고파도 한참 고팠고, 두 사람 모두 신경이 날카로워 져서 들어선 밥집. 김치찌개 하나, 고등어구이 하나 그리고 욕심을 부려 계란찜까지 주문했다.

손바닥만한 뚝배기에 바글바글 끓여 나온 찌개도, 굵은 소금 뿌려서 바짝 구워낸 고등어도 입맛을 당겼지만 이 날 밥상의 주인공은 ‘밥’이었다.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쌀알이 탱글하여 따뜻했던 밥 말이다.

흰쌀에 노란 조를 섞어 지어서 그 색감 또한 예뻤다. 한 그릇을 다 비워가며 먹다 보니 문 밖으로 여지껏 내리는 비가 이제 ‘운치 있게’ 느껴지고. 주문을 깜빡했다며 아주머니께서 서비스 주신 계란 프라이까지 해서 노란 조밥을 단 꿀처럼 먹던 남편.

삼십분 전만 해도 짜증에 찼던 나는 밥 한 그릇에 기분이 풀려 이런 약속까지 덜컥 해 버렸다. “자기야, 이제 내가 밥은 꼭 솥에 ‘지어’ 줄게.”

이번 주말 우리는, 남대문 시장에 작은 무쇠 솥을 사러 가기로 했다.

♡ 밥

정말 ‘밥’이 맛 있는 집에 가면, 다른 반찬이 없어도 한 그릇을 다 먹게 된다. 검정 쌀로 지은 흑미밥, 덜 정제된 쌀로 지은 현미밥, 기타 재료를 넣어 풍성하게 지은 오곡밥, 찹쌀을 섞어 넣는 찹쌀 밥, 그리고 조밥, 팥밥, 콩밥, 영양밥 등 재료 하나라도 더 넣어 만든 밥 덕분에 단골을 확보한 밥집들도 많다.

내 엄마가 어렸을 적에는 커다란 가마솥에 지어 주는 외할머니의 밥이 그렇게 맛있었단다. 가마솥이 크니까 밥 위로 계란찜이나 김치 찜을 올리기도 하고 고구마나 감자를 올려 쪄 먹었다고 한다.

보온 밥솥이 없었으니까 갓 지어진 밥은 아버지 것, 오빠들 것 순으로 놋그릇에 옮겨져 아랫목으로 직행. 따땃한 아랫목에 밥공기가 쭉 놓이고 그 위에 이불이 덮여진다.

이 때 나의 외할머니처럼 센스 있는 주부들은 ‘밥 이불’을 만들어 덮었다는데. 온전히 보온만을 위한 것이었으므로 보통 이불보다 도톰하고, 또 크기는 밥공기 몇 개 덮을 만큼 아담 했다는 것. ‘밥 이불’이라는 말이 정겨워서 나도 아랫목이 있으면 손바느질로 한번 만들어 보고 싶다.

이렇게 정성이 겹으로 들어간 밥은 냄새가 좋고 그 쫄깃한 미감은 말 할 것도 없는데, 그 쫄깃한 맛을 어색해 하는 외국인들은 요상하게 조리하는 경우도 있다.

프랑스에서 요리 공부를 할 때, 그 나라의 셰프가 우리 쌀로 밥 짓는 수업을 할 때였다. 생쌀을 버터에 한 번 볶은 다음 물을 부어 한 소끔 끓이다가 체에 받쳐 물기를 빼고 한 번 헹구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아닌가!

중국 혹은 동남아 음식점에서 맛 보는 길고 건조한 밥에는 익숙한데, 한 입 먹을 때마다 스푼에 쩍쩍 붙는 우리 쌀은 어딘 지 낯설어서 그 맛을 약화시키기 위해 일부러 한번 헹궈 낸 다음 다시 밥을 짓는다고 했다. 정말 입맛은 가지가지다.

♡ 반찬

반찬(飯饌)을 영어로 직역하면 ‘사이드 디쉬(side dish)'란다. 즉, ’메인 디쉬(main dish : 주요리)’는 ‘밥’이라는 말. 그런데 우리의 식탁에서 주 요리였던 밥이 언젠가부터 사이드 디쉬, 즉 곁들임 요리가 되었다.

일전에 모 방송사에서 다큐멘터리를 방영했었는데, 1970년대 이후로 우리 국민들의 밥그릇이 계속 다운 사이즈(down size:규모 축소)를 거듭해 왔음을 보여줬다.

또 언젠가부터 반찬 40개가 나오는 정체 불명의 한정식들이, 가격 대비 푸짐하다는 이유로 인기를 끌면서 ‘반찬 많은 밥상’이 잘 먹고 사는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밥은 적게 먹고 반찬을 많이 먹으면 탄수화물에 편중된 우리 식습관에 좋은 변화를 줄 수도 있지만, 어쨌든 이로 인해 ‘밥’이 과소 평가되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다.

잘 구운 김에 김치 한 가지, 계란 한 개면 비타민과 미네랄, 단백질과 지방이 갖춰진다. 여기에 마른 멸치나 건새우를 추가하면 칼슘까지 갖춰진다. 필요한 영양은 이미 갖춰졌으니 예서 더 먹으면 ‘오버’인 셈.

바삭한 건 새우를 넣어 계란찜을 만들든지, 맨 김에 양념장을 곁들이든지 삶은 계란으로 장조림을 만들든지 쌈 채소를 겉절이 양념해서 김치 대신 먹는다.

또는 감자채에 녹말을 섞어 풀고 매운 고추를 썰어 넣어 부친 부침개는 쭉쭉 찢어서 밥에 곁들이든지, 다진 고기와 마늘에 고추장을 볶은 다음 삭힌 무를 찍어 먹든지 할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찬’이다. 간단히 간소하게 준비해서 잘 지어진 밥에 곁들이면 그만인 조역들이다.

밥을 무시하면 큰코다친다. 우리는 이제 즉석 밥을 전자 레인지에 돌리면 120초 만에 먹을 수 있고, 자기 전 타이머만 눌러 두면 아침에 따끈한 밥을 내 주는 고급 솥이 있고, ‘누룽지’는 이색 먹거리가 되어버린 풍요 속에 살게 되었다.

그렇지만 먹을 것 없이 그저 솥에서 퍼주는 밥 한 그릇에 온가족이 모이던 몇 십 년 전보다 마음은 더 쓸쓸하고 가난해지고 있지 않나. 나부터라도 일주일에 한번은 작은 쇠솥에 밥을 꼭 지어 먹을 테다.

푸드채널 ‘레드 쿡 다이어리’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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