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 도청 테이프에 담긴 홍석현 주미 대사의 언행에서 놀라운 것은 1997년 당시 언론사 사주의 신분으로 삼성의 불법 대선자금을 특정 대선후보 진영에 직접 ‘배달’했다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가 정권의 대표적 정무직 중 하나인 주미 대사 자리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 더 황당하다. 그의 도덕적 결함을 따지려는 게 아니다.
테이프에 따르면 “노조와 호남에 아무리 아부해봤자 절대로 안 되는 만큼 확실하게 보수 편에 서면서…”라고 당시 이회창 신한국당 후보에게 조언했던 그다. 그가 경영한 신문의 보수성향 논조는 따로 말할 필요가 없다.
지금의 그 자리가 그가 살아온 길과 이어지는가. 그는 이 정권의 이념이나 대외 노선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정권은 기능적, 정치적으로 그가 필요했을 수 있다지만, 본인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 자리를 수락했을까.
홍 대사 말고도 헷갈리는 처신을 한 지도급 인사를 찾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요즘 언론을 장식하는 거물도 적지 않다. 모든 여론조사에서 제일 잘 나가는 차기 대권후보는 김영삼 정권의 마지막 총리로서 IMF사태를 맞았음에도, 50년만의 정권교체로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여당 후보로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한 사람이다.
큰 과오를 저지른 정권에서 총리를 지냈다는 것만으로도 미안해서 잠시 쉬었을 법한데 완전히 이질적인 정권에서 또다시 공직에, 그것도 선거직에 나선 것이다.
지금 불법 도청 파문으로 수사선상에 올라있는 전직 국정원장은 김영삼 정권의 초대 비상기획위원장(장관급)을 지낸 사람이다. 그랬던 그는 옷을 벗은 후 1년도 안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계복귀로 국민회의가 창당되자 하루아침에 야당투사로 변신, 자기가 녹(祿)을 먹던 정권에 칼을 겨눴다. 그 덕분인지 정권이 바뀐 뒤 국방장관, 국정원장으로 승승장구했다.
총리를 역임하고 신한국당 대표를 한 뒤 대선후보가 돼 정권을 재창출하겠다며 당 경선에 출마했던 사람이 김대중 정권에서 초대 주미 대사를 덥석 맡은 경우도 있다. 그는 그때 “중요한 시기에 한미관계 발전을 위해”라는 수락이유를 밝혀 실소를 자아냈다. “그 역할을 할 사람이 당신 밖에 없나?”
이에 더해 지난 대선에서 당선가능성을 따져 약삭빠르게 민주당에서 한나라당으로 당적을 옮겼다가 총선에서 대부분 심판을 받은 철새들까지 열거하는 것은 번거롭다.
이 같은 행동을 관통하는 것은 ‘욕심’이다. 정치적 소신과 철학, 신의, 품위 따위는 한가할 때나 찾는 수사적 가치다. 그 동안 언행에 대한 공적 책임의식, 염치, 자괴감 같은 게 있었다면 그런 선택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체면 불구한 자리 욕심이 지도층의 권위를 멍들게 했다.
5공 이후 정치판에서 진퇴에 관한 한 매듭이 분명했던 인사로 회자되는 게 이춘구 전 의원이다. 김영삼 정권이 공천을 주려 했지만, 극구 사양하고 15대 총선 불출마와 함께 정계에서 은퇴했기 때문이다.
군 출신이면서 노태우 전 대통령의 심복이었던 그의 처지에서 본다면 그리 드라마틱한 결단도 아니건만, 그만한 처신도 잘 떠오르지 않는 걸 보면 우리 정치인의 수준은 대충 거기까지가 아닌가 싶다. 이러다가는 “의리고 명분이고 나발이고 높은 자리에 오래오래 앉아 있는 게 장땡”이라고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지 모르겠다.
유성식 정치부 차장 ssyo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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