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큰 형님 보러 가는 거예요.”
거짓말이었다. 화상상봉 가족 중 최고령인 남측 이 령(100)씨를 부축하며 화상상봉장에 들어선 막내아들 서항석(67)씨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를 악물어야 했다. “평생을 큰 아들이 살아있다고 믿으며 버텨오신 분입니다. 몸도 성치 않으신데 차마 비보를 전할 수는 없어요.”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서울에서 근무하다 의용군으로 끌려간 큰 아들 갑석(97년 사망)씨 대신 손자 강훈(47)씨가 부인과 함께 화면에 나타났다. 다른 가족들의 대화 도중 큰 아들의 사망 소식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이미 기력이 쇠해 의식이 가물가물한 어머니는 이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아무 반응이 없었다.
15일 서울 중구 남산동 대한적십자사 이산가족 화상상봉장. 얼굴을 부빌 수도, 손을 맞잡을 수도 없는 차가운 52인치 대형 PDP 화면을 앞에 두고 55년의 시간을 뛰어넘어야 했지만 꿈에 그리던 핏줄을 보게 된 가족들은 화면을 어루만지며 눈시울을 적셨다.
“형님! 잘 들으세요. 아버지 제삿날은 1955년 4월5일, 어머니는 99년 11월30일이에요. 4월5일, 11월30일 입니다. 어머니가 생전에 형님을 얼마나 보고 싶어 하셨는데….” 55년 만에 북쪽의 형을 만난 정인걸(63)씨는 터져 나오는 울음에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면서도 부모님의 기일만은 제대로 알려줘야 한다는 다급한 마음에 목소리를 높였다.
보청기를 끼고도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해 주위를 안타깝게 했던 형 병연(73)씨는 동생이 부모님의 영정을 꺼내 보이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화면을 향해 큰절을 했다. 고향인 광주를 떠나 고려대 법대에 다니던 50년 전쟁발발과 함께 의용군으로 입대한 후 가족들과 소식이 끊겼던 병연씨는 “영애야, 영임아, 나 서울 유학 보낸다고 너희들은 학교도 못 갔지. 오빠가 지금도 정말 미안하다”며 여동생들을 향해 평생을 가슴 속에 담아왔던 응어리를 풀어냈다.
“어머니 눈 좀 떠보시라요. 어머니, 저 보매예요.” 북의 황보매(79) 학실(76) 자매는 휠체어에 앉은 어머니 김매녀(98)씨가 자신들을 알아보지 못하자 가슴을 쳤다. “금방 데리러 오겠다”며 두 딸을 남기고 47년 나머지 가족과 함께 먼저 남쪽으로 내려간 어머니였다. 평생 이 때만을 기다리던 어머니는 지난해 뇌졸중으로 쓰러져 지금도 의식이 온전치 않다.
두 딸은 어머니가 제대로 눈도 뜨지 못하고 고개만 떨구고 있자 자리에서 일어나 어머니를 흔들어 깨워보려는 듯 화면을 향해 손을 휘저었다. “어머니, 제발 말 한 마디만 하라요.” 큰 소리라도 내면 혹시나 잠깐이라도 정신이 돌아올까 해서 연신 “어머니”를 외치던 평양의 딸들은 의사가 어머니의 목에 연결된 관에서 가래를 뽑아내는 모습을 보고는 끝내 목을 놓아 울부짖기 시작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곱게 한복을 차려 입은 북쪽의 세 딸이 구슬픈 목소리로 노래를 이어가자 남쪽 어머니 박여환(94)씨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 내가 원숙이야요. 내 말 들려?”, “그래 들려.” 어머니는 51년 1ㆍ4후퇴 당시 둘째딸 원희(66)씨와 갓난애기였던 막내아들 원선(55)씨만을 업고 남쪽으로 내려왔다. 세 딸과 장남(사망)을 더 이상 볼 수 없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치 못했다.
54년을 기다렸건만 북의 아들은 이날 나타나지 않았다. 남쪽의 둘째 딸 원희(66)씨는 “예전에 방송에서 이산가족찾기 할 때 내가 플래카드를 쓰고 아버지가 방송까지 나가 언니를 얼마나 애타게 찾았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얼마나 우셨는지 모를 거야”라며 울먹였다.
이날 적십자사에서는 5평 규모의 상봉장에 인원 제한으로 들어가지 못한 나머지 가족들이 상봉장 밖에서 까치발을 해가며 유리창 너머 화면에 나타난 북의 가족들을 보려 애썼고, 상봉 장면을 캠코더에 담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이날 이산가족 첫 화상상봉은 서울의 대한적십자사 본사를 비롯, 부산 인천 등 전국 6개 지사에 마련된 상봉장에서 평양의 상봉장을 화상으로 연결해 이뤄졌다. 상봉 규모는 남북 각기 20가족씩 모두 40가족, 총 216명으로 오전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4차례에 나눠 각각 2시간씩 진행됐다.
정동영 통일장관은 이날 상봉장을 찾아 “기술적으로 큰 문제가 없고, 모든 게 원활하게 진행되고 있다”며 “화상상봉이 연중 지속적으로 이뤄지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유상호 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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