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습니다.” 악수를 청하자 그가 손을 내밀었다. 생각보다 손이 작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제 몸보다 큰 첼로를 안고 연주하던 꼬마가 벌써 우리나이로 스물 넷이 됐다. 첼리스트 장한나. 1994년 만 11세에 로스트로포비치 콩쿠르 우승으로 국제무대에 데뷔한 지 11년, 음악가로서 착실히 전진하고 있다.
젖살이 많이 빠졌다고 했더니 “정말요?” 하고 까르르 웃으며 좋아한다. “2주일 동안 매일 주먹으로 열심히 뺨 문질렀어요. 젖살 빠지라고. 제 얼굴이 너무 크잖아요.” 무대에서 연주할 때면 양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입을 오물거리는 특유의 표정. 음악에 몰입해 무아지경에 빠진 그 심각한 모습과 젖살 빼기 분투의 오버랩이 유쾌하다.
뉴욕에 살고 있는 그는 지난 주 입국했다. 베를린필 단원이 주축이 된 베를린필 신포니에타와 협연하는 네 차례 공연을 위해서다. 오늘(16일) 저녁 대전 문화예술의전당에서 시작해 17일 대구시민회관, 18일 서울 예술의전당, 20일 세종문화회관에서 하이든의 ‘첼로협주곡 1번’과 차이코프스키의 ‘안단테 칸타빌레’, 파가니니의 ‘로시니 주제의 변주곡’을 연주한다.
“지난해 무반주 곡들로 내한 독주회를 했을 때, 다음엔 꼭 작은 실내악 앙상블과 함께 해야지 했어요. 지휘자와 독주자에 집중되는 대형 오케스트라 협연과 달리 이번 공연에선 서로 소리를 듣고 대화를 나누는 게 어떤 것인지 확실히 느껴질 거에요.”
장한나는 그 동안 네 장의 음반을 냈다. 2003년 발표한 프로코피에프 음반은 그라모폰, 칸, 에코 클래식 음반상을 휩쓸었다. 11월에는 쇼스타코비치 협주곡을 녹음한 새 음반이 나온다. 스탈린의 폭압을 견뎌낸 위대한 작곡가 쇼스타코비치는 내년이면 태어난 지 100년이다. 때 맞춰 기획한 음반인가? 구 소련 출신 솔로몬 볼코프가 쓴 쇼스타코비치 회상록을 보면 쇼스타코비치는 프로코피에프를 무척 싫어한 것 같은데.
“프로코피에프에 이어 쇼스타코비치를 녹음한 건 자연스런 흐름이에요. 쇼스타코비치가 프로코피에프의 ‘신포니아 콘체르탄테’를 듣고 자극을 받아 쓴 게 첼로협주곡 1번이니까요. 3악장 카덴차를 프로코피에프보다 두 배 더 길고 어렵게 썼죠. 쇼스타코비치 음악에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이 깔려 있어요.
음 하나하나를 평가 받아야 하고, 말 한 마디로 식구들이 위험에 처할 수도 있고, 작품에 대해 신문이 ‘이건 음악도 아니고 소음’이라고 비난하는, 그런 뼈저린 현실. 반면 프로코피에프 음악은 어린애다운 상상에 빠져드는 음악이죠.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곡은 얼마나 낭만적이고 환상적인지. 두 사람은 정말 달라요. 서로 좋아할 수가 없죠.”
책벌레 장한나는 볼코프의 책도 읽었다.
“아, ‘테스티모니’(Testimony, 증언)라는 책이죠? 쇼스타코비치의 삶과 생각을 알 수 있겠구나 싶었죠. 그런데 끝까지 읽었더니 그는 누구일까 하는 의문이 드는 거에요. 그는 자신에 대해 말하려고 하지 않죠. 시작 부분에서 ‘거짓말’ 얘기를 하잖아요? (책 본문을 인용하면 이렇다. “이 글은 나 자신에 대한 회상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회상록이다. 우리 이야기는 다른 사람들이 쓸 것이다. 당연히 그들은 시치미를 떼고 거짓말을 하겠지. … … 이 글은 직접 본 사실에 대한 증언이다. 물론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한다’는 말도 있다.”) 쇼스타코비치를 이해하는 길은 음악 뿐인 것 같아요. 음악은 거짓말을 할 수 없으니까.”
거짓말 할 수 없음. 그런 정직함이야말로 장한나가 음악을 대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지난해 인터뷰에서 그는 말했다, “꾸준히 그리고 천천히 나아가고 싶다”고.
신동으로 일찌감치 주목을 받은 연주자가 자칫 빠질 수도 있는 위험, 유명세의 휘황한 거품 위에 떠돌다 가라앉는 비극 없이 미덥게 성장한 것도 그런 자세 덕분일 것이다. 열두 살 때부터 말러를 좋아한 ‘애늙은이’ 장한나는 요즘 지난해 타계한 지휘자 카를로스 클라이버에 푹 빠져있다고 했다.
2003년 가을 하버드대에 들어가 철학을 전공하는 그는 두 학기를 다니고 휴학 중이다. 연주가 많아 학업을 병행하기가 쉽지 않다. 이번 공연을 마치면 뉴욕 집에서 한달 휴가를 보낼 거라고 했다.
“책 읽고 공부해야죠. 언젠가 대학에 다시 돌아가야 하니까.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를 읽기 시작했는데, 여덟 권이나 돼요. 음악가는 외로운 존재에요. 혼자 고민하고 연습하고 터득해야 하니까. 하지만 그런 시간이 없으면 불행해요. 혼자만의 생각과 시간을 갖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죠.”
꾸준히 그리고 천천히. 장한나의 올 여름 휴가는 그렇게 흘러갈 것 같다. 음악과 나란히.
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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