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태어났다. 천성이 내향적이었던 나는 늘 기가 죽어있었다. 노래와 유희를 가르쳐주는 유치원에도 다녀봤지만 친구가 없어서 별로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거기서 주는 과자만이 맛있었을 뿐.
공부도 열심히 하지 않았다. 국민(초등)학교에 입학할 즈음 아버지가 연필과 종이를 주고 공부하라 했는데 도망친 생각이 난다. 하도 공부를 안 해서 아버지는 밧줄로 내 허리를 동여 매고 우물에 빠뜨리려고 하면서까지 공부하라고 혼낸 적도 있다. 당시 학교 성적은 우(優) 양상(良上) 양(良) 가(可)순으로 평가했는데 초등학교 1학년 말 내 성적은 하나가 ‘가’이고 나머지는 전부 ‘양’이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그때까지 국어책(일본어)도 제대로 못 읽었다는 사실이다.
태평양 전쟁 말기여서 미군기(B29)의 폭격이 점점 심해지자 우리집은 하야시노(林野)란 곳으로 이사를 갔다. 거기서는 공부를 좀 낫게 했다. 전학한 지 얼마 안 되어 담임인 여선생님이 교무실로 오라고 해서 가니까 책을 읽어 보라고 하셨다. 읽고는 잘 읽는다는 칭찬을 들었다.
칭찬이라곤 별로 들어본 적 없는 나에게 “잘 읽었다”는 말은 마치 어둠 속에 비친 한 줄기 햇살 같았다. 칭찬과 격려가 학생의 능력을 발휘하게 한다는 ‘피그말리온 효과’가 나타났다. 내가 ‘겐뀨(硏究)’라는 말에 매혹된 것도 이 무렵이 아닌가 싶다. 모르는 것을 계속 탐구해 들어간다는 이 말의 숭고함에 빠졌다. 그래서 과학자가 되고 싶었다. 에디슨 같은 발명가를 꿈꾸다가 중ㆍ고등학교 때는 아인슈타인을 따라 물리학자가 되겠다는 꿈을 품었다.
해방의 소식을 들은 것은 초등학교 4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그때 일본에는 맥아더 원수가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거울을 아래로 비추면 그 아래 있는 것이 다 타버린다는 소문이 나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원자폭탄의 위력을 이야기한 것이었다. 그 해 가을 고베(神戶)로 와서 처음으로 ‘가갸거겨’를 배우러 다녔다. 해방이 되면서 생긴 한글학교였다. 뜻도 잘 모르면서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이라는 노래를 열심히 따라 부르던 생각이 난다.
하지만 그렇게 배운 한국어 실력이 대단할 리가 없었다. 한국 역사나 상식에는 아는 게 전무했다. 해방 이듬해 한국으로 돌아와서 대구 중앙초등학교에 편입했다. 첫번째 시험이 국사였다. 백지를 나눠주더니 교사가 문제를 칠판에 적었다. ‘단군이란?’ 단 한 문제였다. 글자는 읽겠는데, ‘단군’이 무엇인지 도저히 알 수 없어 하얗게 제출했더니 달걀이 나왔다. 학년말에는 78명 가운데 73등을 했다. 부모님이 학교에 불려가셨다 온 후 겨우 가진급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공부가 쌓이면서 5학년 때 38등, 6학년 때 29등으로 점차 올라갈 수 있었다.
내가 그나마 점차 공부가 나아진 것은 초등학교만 네 번 바꾼 덕분이다. 같은 학교에 있었다면 공부를 못한다는 낙인이 찍혀 기를 펼 수 없었을텐데 새 학교에 가면 그걸 모르니까 새 출발을 다짐할 수 있었다. ‘자기암시법’을 창안한 프랑스 약제사ㆍ심리학자 에밀 꾸에의 말대로 “매일 모든 면에서 나는 점점 더 좋아진다”를 마음 속으로 다짐했다. 꾸에는 환자들에게 이 말을 되풀이 하게 해서 병을 고쳤다고 한다. 병의 70%는 마음에서 생겨난다고 하니 효과가 좋을 수 밖에. 나 역시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니 점차로 공부가 잘되기 시작했다. 중학교는 3차에서야 합격을 했지만 고등학교는 단번에 경북고등학교에 붙었고 대학은 서울대 문리대 영문학과에 합격했다.
그 사이에 아버지가 일본으로 다시 돈을 벌러 가시는 바람에 집안 살림은 어렵기 짝이 없었다. 나는 아버지가 일본에서 부쳐주는 책을 깨끗하게 읽고는 헌 책방에 팔아서 학비를 대곤 했다. 그때 한국에는 전문서적이 부족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우편으로 부쳐주시는 책은 한국의 교수들이나 헌 책방 주인에게 모두 환영을 받았다. 나도 물리학자가 되기 위해 과학책을 많이 받아서 읽었다. 대학 전공을 영문학으로 정한 것도 물리학을 하는데 영어가 필요하니 실력을 쌓아두자는 생각에서였다. 2학년으로 올라갈 때 물리학과로 전과하겠다는 생각은 결국 수학을 잘 할 자신이 없어서 포기하고 말았지만.
그러나 영문학과에서 배우는 문학 작품에서는 전혀 매력을 느낄 수가 없었다. 아름답지도 않은 것을 실제 이상으로 미화시킨다고 느껴서 문학이란 거짓이라는 반감만 들었다. 다행히 그 때 보들레르의 ‘악(惡)의 꽃’을 만났다. ‘예술은 미의 추구’라는 관념이 깨어지는 순간이었다. 참다운 문학은 미를 초월하여 인간의 근원을 뒤흔들어 놓는 진실이 있어야 함을, 그래서 깊은 공명을 일으킬 힘을 지녀야 함을 깨닫게 되었다. 악(惡)의 심연에 깊숙이 빠지면서도 악을 한층 의식하고 더욱 처절히 절규하는 보들레르를 만나고부터 문학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 후에 읽은 엘리어트, 조이스, 초오서, 셰익스피어, 브라우닝 등은 모두 죽은 사람들이 아닌 살아 있는 친구가 되어 버렸다.
당시 영문과의 교수들 가운데 영국이나 미국에서 유학한 이들은 한 분도 없었다. 그러니 대학공부라는 것은 독학이나 마찬가지였다. 학교 수업보다는 혼자 알아서 원서를 열심히 구해 읽었다. 덕분에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자생능력을 평생토록 갖추게 되었다. 대신 이양하 교수님은 가난한 나를 위해 민중서관에서 장학금도 얻어주시면서 생활할 힘을 주시곤 했다.
대학원에 들어가니 그제야 영국인 레이니 교수를 만나 비교적 제대로 된 영문학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당시 나는 조이스의 ‘율리시즈’를 혼자 독파하고 있었는데 모르는 것이 나타나면 언제나 레이니 교수를 찾아갔다. 그 분은 질문을 많이 하는 나를 기특하게 보셨던지 ‘닥터 리’라고 부르시면서 아껴주셨다. 반면 영자신문에 실릴 글을 보아달라고 이따금씩 찾아오는 영문과 교수님은 별로 반기지 않으셨다.
대학원에 다니던 중 영국문화원 장학금을 받아서 영국 엑시터 대학으로 1년간 유학을 떠났다. 그동안 혼자서 책으로만 보던 셰익스피어와 엘리어트, 조이스의 고향을 확인하고 작품 속에 나온, 잘 모르는 표현이 무엇을 뜻하는 지를 눈으로 확인하는 기회였다. 엘리어트의 ‘타버린 노튼가’(Burnt Norton)를 읽으면서 ‘box circle’의 의미가 의아했는데 작품의 무대가 된 고가를 방문한 결과 그게 바로 직사각형으로 된 연못에 반원형 연못이 이어져 있어서 생긴 표현임을 알게 되었을 때의 기쁨이라니.
영문학은 내게 다만 영어로 표현되어 있다는 점만이 다를 뿐 한국문학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이야기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러나 무대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기 때문에 그 내용을 정확히 파악하려면 문장과 단어의 뜻을 명확히 알아야 한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에는 너무도 안이한 번역이 많다. 그래서 틀린 표현이 고쳐지지 않고 계속 이어지고 있다. 번역된 책을 읽다가 이상한 곳이 있어서 원문과 대조를 해보면 틀림없이 잘못된 것이다. 심지어 원전과는 동떨어진 내용으로 오역된 책이 베스트셀러라는 이름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바로잡아 주려고 문제점을 지적해도 고치질 않는다.
나는 책 한 권의 뜻을 바르게 파악하기 위해서 수 십 종의 사전을 찾는다. 영문학 작품 뿐 아니라 서양문학의 배경이 된 그리스ㆍ로마 신화와 문학, 성경도 비록 영어를 통해서지만 중요한 고전은 다 내용을 파악하고 있으려고 한다. 그리고 그리스신화ㆍ문학 성경 문학작품 오페라 뮤지컬 세계여행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녹화해서 본다. 사전의 뜻을 안다는 것만으로는 파악이 안 되는 현장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번역은 어려운 일이다.
오역이 나오는 데에는 우리나라 사전에도 문제가 있다. 수록어는 많지만 제대로 된 사전이 없다. 한국어 사전도 그렇고 영한 사전도 그렇다. 1970년우연히 시사영어사에서 간행된 ‘뉴월드 영한사전’을 보다가 sir에 ‘경(卿)’이란 번역어가 없는 것을 발견하고서 하도 이상하여 사전 맨 뒤의 백지에다가 메모를 했다. 이때부터 영한사전, 국어사전을 뒤지며 말과의 씨름과 공부를 시작했다. 이 같은 문제점을 지적한 책을 내놓았지만 여전히 queen은 왕비가 아니라 여왕이고 Greensleeves는 그린슬리브즈라는 여자가 아니라 푸른 옷소매라는 사실이 안타깝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머리가 총명하지도 기억력이 탁월하지도 못하다. 다행히 나에게는 메모하는 버릇이 있다. 햄리트도, 엘리자베스 시대 젊은이들도 수첩을 갖고 다니며 좋은 착상이 떠오르면 메모하는 버릇이 있었다. 가장 좋은 공부방법은 메모하는 것이다. 그리고 매순간 배운다는 마음으로 탐구하는데 있다. 나는 여태까지 나를 학자(scholar)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언제나 지적(知的) 호기심이 많은 ‘공부하는 사람(student)’이라고 여겨왔다. 그런 마음으로 오늘도 나는 메모하고 공부한다.
●이재호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서양문학 번역의 문제점을 꾸준히 지적해온 전문가이다. 그는 영한사전이 가장 널리 쓰이는 단어 뜻풀이가 없는가 하면 번역어를 소개하지 않고 뜻풀이 식으로 써놓아 실질적으로는 사전의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또한 원문의 뜻을 파악 못한 상태에서 상상력을 발휘하여 엉뚱한 이야기로 옮겨놓는 국내의 번역 수준을 비판하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영시 총서’ ‘영한사전 비판’과 ‘문화의 오역’ 같은 책을 냈다.
1935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으며 46년 귀국했다. 서울대 영문과와 대학원을 나왔으며 영국 엑시터 대학에서 수학했다. 이화여대 강사로 시작, 성심여대와 단국대 교수를 거쳐 1980~2001년 성균관대 영문과 교수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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