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의 삼성 수사가 답보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언론을 통해 이학수 부회장과 홍석현 주미대사의 1997년 불법 대선자금 제공 관련 대화를 도청한 ‘X파일’ 내용이 보도되고 진상규명 여론이 들끓은 지 3주째. 검찰은 그동안 도청행위와 테이프 유출은 발빠르게 수사했지만 삼성 비리 의혹에는 소극적인 모습으로 일관하고 있다. 수사를 한다는 것인지 안 한다는 것인지, 방침조차 애매모호해 보인다.
지난주 재개된 삼성 채권 500억원 수사는 검찰에게 한층 깊은 고민이다. X파일 수사에 대한 자세로 보면 이 역시 “검토해 보겠다”고 밝히는 수준에서 관망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검찰 스스로 지난해 대선자금 수사를 마무리하면서 “해외로 도피한 참고인이 귀국하면 수사를 재개하겠다”고 밝힌 마당에 수사를 안 할 도리는 없다.
검찰의 고민은 곳곳에서 드러난다. 사건을 맡은 대검 중수부 관계자는 지난주 말 “참고인을 조사해 채권 번호를 파악한다 해도 사용처 입증이 쉽겠느냐”며 한발 빼는 모습을 보였다. 잠적중인 채권 매입자 최모씨를 조사해야 채권의 흐름이나 사용처를 파악할 수 있다고 하면서도, ‘추적 전담반’ 편성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검거반이 필요한) 다른 중요한 사건이 많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검찰은 지난해 수사에서 삼성측의 함구 작전에도 불구, 300억원이 넘는 부분에 대해 증거를 찾아 유죄판결을 받아냈다. 97년 대선자금 제공 의혹에 대해서는 “시간이 많이 흘렀다. 증거가 남아있지 않아 혐의입증이 어렵다”고 고충을 토로하지만, 2002년 대선자금은 많은 시간이 지난 것도 아니다. 또 지난해 온 나라를 뒤흔들었던 대선자금 수사의 최대 미스터리인 삼성 채권 수사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자세는 검찰 내부에서도 납득하기 어렵다는 얘기가 흘러나온다.
500억원의 사용처가 드러날 경우 97년 자금보다 훨씬 큰 폭발력을 지닌다는 점도 검찰에게는 고민이다. 500억원의 상당 부분이 한나라당은 물론, 당시 민주당과 노무현 후보 캠프에도 전달됐다는 의혹이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9일 이학수 부회장 소환 이후 추가소환 없이 잠잠하기만 한 X파일 내용 즉 삼성의 97년 불법자금 수사도 사정은 비슷하다. 수사팀 관계자는 13일 “도청이 우선이지만 그냥 덮어두지는 않을 것”이라며 의지를 내비쳤지만 여전히 구체적 수사 방침은 밝히지 않고 있다.
삼성 수사는 이런 정치적 의미 말고도 경제적 상징성을 띤다. 국가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재벌의 비리를 파헤쳐 일벌백계의 효과를 얻을 수도 있지만, 일등기업에 타격을 주는 것이 결과적으로 국익에 도움이 되느냐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또다시 삼성과 마주친 검찰이 어떤 해법을 내놓을 지 주목된다.
김용식기자 jawoh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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