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처음 만났습니다. 굳은 표정, 무서운 눈빛.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토록 그를 분노케 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됐습니다.”
14일 서울 서초구 방배동 한 사무실. 일본의 ‘재한군인군속재판지원회’ 사무국장 후루카와 마사키(古川雅基ㆍ43)씨가 ‘태평양전쟁피해보상추진협의회’ 대표 이희자(63)씨에게 첫인상을 얘기하자 이씨는 미안한 듯 조그만 웃음을 보였다. 이제는 눈빛만 봐도 의중을 알 수 있을 만큼 가까운 사이지만, 그들의 첫 만남은 한ㆍ일 양국의 역사만큼이나 골이 깊었다. 일제에 강제 징용됐던 이씨의 아버지가 일본 A급 전범들의 위패가 있는 야스쿠니(靖國) 신사에 합사돼 있는 까닭이다.
일본 정부를 상대로 야스쿠니합사취소소송 등을 제기한 이씨와 재판지원회를 만들어 이씨를 돕고 있는 후루카와씨가 처음 만난 건 1995년 고베(神戶) 대지진 때. 고베시 공무원이었던 후루카와씨는 구호활동을 하던 중 태평양전쟁피해보상추진협의회 홍보차 인근 오사카(大阪)를 방문한 이씨를 만났다. 가해자인 일본인으로서 뭔가 속죄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지만 첫 만남은 인사만 나눈 채 끝났다. “고베 대지진의 참상을 보며 일본의 죗값이자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했다”는 이씨의 고백조차도 훗날에야 들을 수 있었다.
평범한 40대 주부였던 이씨가 자신이 태어난 지 13개월 만에 일제에 끌려가 행방불명 된 아버지를 찾아 태평양전쟁 피해자 모임에 뛰어든 것은 1989년. 3년간의 노력 끝에 92년 일본 정부가 우리 정부에 전달한 태평양전쟁 전사자 명부에서 아버지 이사현씨가 중국 광시성에서 1944년 6월 11일 사망했다는 기록을 발견했다. 하지만 그가 정말 충격을 받은 것은 그로부터 5년 후였다. 97년 일본 시민단체 관계자의 제안으로 일본 군인과 군속의 징용ㆍ징병기록인 ‘유수명부(留守名簿)’를 뒤지다가 아버지 이씨가 야스쿠니에 합사돼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름 리하라 시렌(李原思蓮), 계급 陸軍雇員(육군 군무원), 소속부대 특설건축근무 제 101중대, 사몰(死歿)연일 소화 20년(1944년) 6월 11일, 사몰장소 중화민국 廣西省 全縣 제181 兵病院, 사몰시 본적 조선 경기도 강화군 송해면 영정리, 사몰시 유족(부) 三封, 합사연월일 소화34년(1958년) 4월 6일.’ 아버지의 일본명과 조부 이름인 ‘삼봉’, 본적 강화군 송해면까지 틀림없는 아버지였다.
“심장이 멎는 줄 알았습니다. 그렇게 돌아가신 것도 억울한데 천황을 위해서 영광스럽게 목숨을 바친, 그래서 일본을 위한 신이 된 혼령들을 모셨다는 곳에 있다니…. 도저히 일본을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후루카와씨가 이씨에게 다시 연락을 해온 것은 이씨가 도쿄지방법원에 150명의 원고인단을 대표해 야스쿠니합사취소소송과 유골반환소송,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한 2001년. 현재 야스쿠니 신사에는 총 213만3,915명의 태평양전쟁 전몰자 중 2만1,000여명의 한국인이 합사돼 있다. 4년을 끈 재판은 내년 3월이면 결론이 난다.
이씨는 “한국에서는 오히려 관심이 없고, 정부도 소극적”이라며 “죄책감 때문인지 일본인들이 자료를 구해 주거나 소송에 필요한 도움을 주는 등 훨씬 더 헌신적이다”고 말했다. 이씨가 지난 6월 중국 광시성에서 처음으로 아버지씨의 제사를 지내는 데 함께 해 준 사람도 후루카와씨 등이었다.
“일본에서 야스쿠니가 어떤 의미를 갖는 곳인지 아는 사람은 10% 정도 밖에 안 됩니다. 저는 일본인으로서 강제로 끌려온 분들의 영혼마저 유린하는 정부의 만행이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고 싶을 뿐입니다.” 후루카와씨가 이씨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이씨와 후루카와씨의 사연은 다큐멘터리 영화 ‘안녕, 사요나라(あんによんㆍサヨナラ)’(김태일ㆍ가토 구미코(加藤久美子) 공동연출)로 제작돼 15일 일본 오사카에서, 16일 한국 국회의원회관에서 시사회를 갖고 10월 양국에서 동시 개봉될 예정이다.
유상호 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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