훨훨 타오른다.
야트막한 꽃동산을 뒤덮은 8만 그루의 묘목이 시뻘건 혀를 낼름거리는 화염에 고통스럽게 몸을 뒤튼다. 여리고 고운 가지가 툭툭 꺾일 때마다 보는 이의 마음 속에도 불길이 치민다. 꽃나무가 고개를 꺾는 소리가 총탄처럼 가슴에 박힌다.
1933년 11월 강원 홍천군 서산면 모곡리. 일명 보리울로 불리는 이곳에 만발한, 빛깔 고운 이 꽃을 사람들은 무궁화라 불렀다. 져도 져도 다시 핀다 하여 조선인들이 몹시도 사랑한 꽃이었다.
불태우고… 뽑고… 짓밟고…
일제 강점 36년간 핍박받고 탄압받은 것은 사람만이 아니었다. 독립지사들이 광복 구국정신의 표상으로 무궁화를 내세우자 일제는 닥치는 대로 무궁화를 불태우고 뽑아버리는 저열한 방식으로 꽃을 박해했다.
보리울 사건은 1933년 11월2일 강원 홍천경찰서 사법주임인 신현규가 보리울학교의 남궁 억 선생을 찾아오면서 시작됐다. 일제하 애국교육운동에 헌신한 남궁 억은 ‘조선이야기’ ‘한국위인’ 등 민족사를 저술하는 한편 평생 무궁화 보급운동을 펼치며 민족의식을 고취한 인물. 그는 무궁화 묘목을 사겠다며 접근한 신현규에게 “사쿠라는 활짝 피었다가 이내 지지만 우리 국화 무궁화는 면면히 피어나는 꽃”이라며 “한국의 역사도 무궁화처럼 면면할 것”이라고 말했다가 체포된다. 보리울학교는 즉각 폐쇄됐고 무궁화 묘목 8만그루도 전량 소각됐다.
남강 이승훈이 세운 오산학교의 무궁화도 일제에겐 눈엣가시였다. 일제가 교정의 무궁화동산을 철거할 것을 지시했으나 말이 먹히지 않자 강제로 무궁화를 뽑아 짓밟고 불태웠다. 격분한 학생들이 항거했으나 돌아온 것은 강제 휴교였다. 1928년에도 대구사범학교에서도 유사한 사건이 일어났다.
일제는 무궁화를 닮은 것이면 무엇이든 탄압했다. 무궁화를 두른 모양의 중앙학교 모표가 사용 금지됐고, 근화여학교의 교복도 무궁화와 색깔이 비슷하다 하여 탄압을 받았다. 조선소년군의 항건(項巾)은 무궁화 문양을 사용했다가 1937년 소년군 간부들이 구금됐으며, 동아일보 제호도 검열에 걸려 무궁화 도안이 삭제됐다.
“불결한 꽃, 불길한 꽃”… 온갖 흑색선전
왜곡과 날조도 끊임없이 이어졌다. ‘무궁화를 보고 있거나 만지면 그 꽃가루가 눈으로 날아와 눈에 핏발이 서고 눈병이 난다’는 기괴한 소문이 나돌아 무궁화는 한동안 ‘눈에 피 꽃’이라는 흉측한 이름으로 불렸다. ‘부스럼꽃’이라 하여 무궁화 꽃가루가 몸에 닿으면 부스럼이 난다는 날조도 서슴지 않았다. 일제가 무궁화를 이 땅에서 내몰기 위해 지어낸 거짓 풍문임에도 불구하고 이후 무궁화는 공원의 구석진 곳이나 화장실 주변 등 외지고 더러운 곳에만 심어지는 서러움을 당했다.
홍영표(78) 한국무궁화연구회장은 “무궁화는 일제 침탈이라는 가혹한 역사를 함께 한 애닯은 꽃”이라고 했다. 그는 “광복 60주년을 맞아 올해는 과거의 아프고 수치스러운 질곡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이제라도 나라꽃 무궁화의 위상을 새로 정립하도록 각계의 관심을 모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박선영 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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