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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실에서] 각질화 그리고 무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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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실에서] 각질화 그리고 무감각

입력
2005.08.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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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불침을 경험해본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변변한 소일거리가 없던 때라 밤이면 젊은이들이 동네 사랑방에 모여 이런저런 놀이로 긴 시간을 함께 보내곤 했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재미를 찾아 모였지만 고된 농사일로 이미 파김치가 된 상태라 초저녁부터 잠에 곯아떨어지는 친구가 있기 마련이다.

당연히 이런 친구가 불침의 희생자가 되었다. 성냥개비를 태워 만든 가느다란 숯 막대를 살갗에 세워 불을 붙이면 잠시 후 잠자던 친구는 뜨거움에 잠이 깨 소동을 벌이는데 나머지는 시치미를 떼고 이 소동을 즐겼다.

불침 중에 가장 고약한 것이 발 뒤꿈치를 달구는 불침이다. 굳은 살이 단단히 박힌 발 뒤꿈치에 성냥불이나 촛불을 갖다 대어 5~6초간 달군 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딴전을 피우고 있으면 몇 초 뒤 잠자던 친구가 화들짝 일어나 뜨거움을 못 참아 비명을 지르고 발을 구르며 나뒹군다.

●고유가에 꿈적않는 나라

그 뜨거움의 강도가 워낙 심하고 또 오래 가기 때문에 화가 치민 친구는 범인을 찾아내려 기를 쓰지만 허사가 되기 일쑤다. 불침을 놓았든 당해보았든 불침과 얽힌 추억은 당하는 사람의 고통이나 그 소동을 재미있어 했던 기억이 워낙 생생해 쉬 지워지지 않는다.

척추동물 피부의 겉껍질은 케라틴(keratin)이란 경단백질에 싸여있다. 털 모발 깃털 뿔 손톱 말굽 비늘 등은 진성 케라틴, 보통 피부와 신경조직 등은 유사 케라틴으로 구성돼 있다. 합쳐서 보통 각질(角質)이라고 부르는데 진성 케라틴과 유사 케라틴의 차이는 α-아미노산의 일종인 시스틴(cystine)의 함유량의 많고 적음에 따라 결정된다고 한다.

발 뒤꿈치를 달구는 불침이 위력적인 까닭은 각질화한 유사 케라틴 때문이다. 맨발로 흙과 접촉하는 기회가 많은 시골 사람들의 발 뒤꿈치는 단단한 껍질처럼 변해 외부에 대한 감각이 무딜 수밖에 없다. 그래서 불을 갖다 대도 당장 뜨거움을 못 느끼고 뜨거움이 각질층을 지나 진피로 전달된 후에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유가의 신기록 행진이 이어지고 있는데도 정부나 국민 모두 꿈쩍하지 않는다. 경기는 말이 아니라는 데 신차가 나오면 계약고 신기록 경쟁이 벌어진다. 특히 대형차나 외제차의 판매는 식을 줄 모른다. 금요일 오후부터 일요일 밤 늦게까지 고속도로와 관광지 도로는 주차장을 방불케 한다.

경기부진을 의식한 때문인지 정부도 유류절약을 위한 비상대책은 내놓지 않고 있다. 옛날 같으면 한집 한등 끄기, 부제 운행, 네온사인 제한 등의 조치들이 나왔을 법 한데 평소와 달라지는 게 없다. 과연 우리나라가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인가 의문스러울 정도다.

우리나라가 이 정도의 고유가에도 견딜 만큼 내성을 갖췄다면 다행인데 절대 그렇지는 않다. 하도 장기간 고유가 행진이 이어지고 정부도 이렇다 할 조치를 취하지 않으니 국민이나 정부 모두 고유가에 너무 둔감해진 탓으로 밖에 설명할 수 없다.

●치명적인 각질화 만연

최근 벌어지고 있는 우리 사회의 온갖 병리현상의 원인도 각질화의 만연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무차별적으로 자행되어온 정권 차원의 도청, 도청으로 드러난 정ㆍ경ㆍ언 유착, 재벌가문의 형제 싸움으로 드러나는 재벌의 치부, 고질적인 대기업의 분식회계 관행 등도 관련 기관ㆍ기업 또는 당사자의 윤리의식이나 양식, 판단력 등의 각질화가 빚은 결과로 보인다.

각질의 효용과 기능은 외부 충격을 완화해 신체를 보호하는 데 있다. 그러나 외부의 변화를 예민하게 감지해야 할 부분이 각질화해 버린다면 그것은 큰 문제다. 이때는 내성이 아니라 불감증이 되고 만다.

지금 우리사회의 요동은 그 동안 광범위하게 진행되어온 심각한 각질화로 병리현상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그 고통이 깊어져서야 뒤늦게 야단법석을 떠는 모습이 아니고 무엇인가. 뇌가 왜 딱딱하게 굳으면 안 되는지, 손이 왜 부드럽고 말랑말랑해야 하는지 알 것 같다. 각질화의 치명성을 깨닫는다.

방민준 논설위원실장 mjb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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