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사내의 붉은 마음(丹心), 산처럼(若山) 굳세라.’
실력을 키워 훗날을 기약하자는 명분으로, 일제의 패망을 도무지 짐작할 수 없다는 두려움으로 부일과 친일을 주저하지 않던 변절의 시대. 사위를 옥죄던 일제의 힘 앞에 좌절하거나, 미혹되지 않았던 진짜 조선 사내들이 있었다.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돼 1936년 중국의 뤼순 감옥에서 생을 마감한 단재 신채호 선생이 그랬고 의열단을 조직해 살인과 약탈을 일삼던 일제에 대한 테러를 감행했으며 조선의용대를 창설한 약산 김원봉 장군이 그러했다.
단재와 약산 같은 이들의 찬란한 분투로 민족해방사가 하나씩 채워지지 않았다면 1945년 8월15일의 광복은 참으로 낯부끄러웠을 지 모른다.
김삼웅 독립기념관장의 ‘단재 신채호 평전’과 소설가 이원규씨의 ‘약산 김원봉’은 항일 무력 투쟁의 중핵이었던 두 인물의 삶을 복원한다.
단재는 조국해방을 위해 언론 문학 사학 대종교 아니키즘 등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싸웠던 당대의 지식인이었다. 그런 단재의 전기소설 ‘을지문덕전’ ‘이순신전’을 읽고 자란 소년들 중에는 커서 일제의 체포대상 1호가 된 약산이 있었다.
1919년 22세의 젊은 나이에 ‘의열단’을 창단한 약산은 그로부터 4년 뒤 단재에게 ‘조선혁명선언’(의열단선언)을 써줄 것을 부탁한다. 만해 한용운 선생의 ‘조선독립의서’와 함께 식민지시대 2대 명문으로 꼽히는 조선혁명선언에서 단재는 외교론, 준비론, 문화운동론의 허상을 까발리고 민중에 의한 폭력 투쟁을 주장한다.
의열단을 이끌며 조선총독부와 종로 경찰서 등의 폭탄 투척을 주도했고, 조선의용대 대장으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약산의 사상적 기반을 제시한 것이다.
그렇게 그들에게 조국은 신념이었고 종교였으며 모든 것이었다. 하지만 해방된 조국은 이들에게 쓰라린 상처만을 남겼다. 일제가 시행한 호적법을 거부했던 단재 신채호 선생은 광복 60주년 행사가 떠들썩하게 펼쳐지고 있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무국적자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해방이후 남북분단을 막기 위해 노력했던 독립운동의 영웅 약산은 1958년 김일성에 의해 숙청당한 뒤 남과 북 모두에서 잊혀졌다. 그렇게 해방 후 극단적 이념 대결과 외세의 개입으로 탄생한 남북분단체제가 남겨놓은 불의의 역사는 진행형이다. 우리는 아직 광복을 맞지 못했다.
김대성기자 lovelil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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