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이나 곡괭이로 파헤치지 않아도 시간은 비밀을 잘도 캐낸다. 시간은 비밀의 광부인가? 광석뿐만 아니라 은밀한 속삭임마저 캐내니, 뜻밖에 잃었던 목소리를 되찾은 사람들은 어쩌면 기뻐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온 나라가 도청 문제로 도취되어 있으니 하는 말이다. 세상도 돌아가고, 테이프도 돌아가고.
도청은 없다지만, 그래도 테이프는 돈다. 우리는 ‘갈릴레오’가 아닌 ‘걸릴레오’이다. 누가 감히 도청에 관한 우리의 지동설을 부인할 수 있단 말인가?
미국의 대법관 윌리엄 더글라스는 1960년대 자신의 판결문에서 “우리는 급속도로 프라이버시가 없는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는데, 한국은 미국보다 진도가 좀 늦긴 했으나,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인한 프라이버시의 훼손은 도처에 널린 환경파괴 못지않게 심각하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것은 프라이버시의 파괴가 부패와 범죄가 없는 투명한 세계를 구축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경향이다.
지금 한국 사회는 거의 위험할 정도로 투명해지고 있다. 거리를 걷거나 건물에 들어가 있는 동안, 자신도 몰래 화면에 등장하고, 만지는 것마다 지문이 묻고 가는 곳마다 발자취가 남는다. 발자취는 대개 역사적인 인물이나 남기는 것인데, 이제는 이것 역시 전국의 땅값처럼 평준화가 되고 있는 것인가?
최근 열대야가 아닌 도청으로 잠 못 이루는 밤은 우연히 또는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요, 그 동안 우리의 빅 브라더가 국민 세금으로 스토킹을 한 결과이다. 조지 오웰의 ‘1984’에 나오는 사상경찰(Thought Police)이 우리에게는 결코 허구가 아니었다.
주위를 둘러보라. 최근 웅장하고 거대한 빌딩들은 대개가 관공서를 비롯한 공공건물들이다. 내가 사는 광주만 해도 경찰청을 비롯해 산하 경찰서들이 거대한 규모로 지어지고 있다. 차를 타고 달리다 보면 정보부 건물이 산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데, 과연 이들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할수록 섬뜩한 것은 우리 모두는 이미 벤담이나 후코가 이야기하는 패놉티콘 (Panopticonㆍ원형감옥)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항상 누군가에 의해 감시당하는 구조 말이다.
이런 사회적 구조의 구조적인 문제는 단순히 정치적인 특별법이나 특검으로 해결될 수는 없다. 도청에 연루된 인사들의 문제는 자신들이 진작부터 벌거벗은 임금님인 줄을 몰랐다는 사실이다. 여름에 터진 도청 사건, 노출의 계절에 잘 어울리는 사건 아닌가.
최병현 호남대 영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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