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감기 증세로 며칠 고생하신 분이 처방을 받으러 왔습니다. 목이 아프고 기침도 심한 분이지만 세균성 감염보다는 감기 바이러스로 인한 소견을 보여서 소염진통제를 처방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은 그런 약은 먹어도 낫지 않았으니 센 약을 처방해 달라며 항생제를 요구합니다. 감기 바이러스에 항생제가 듣지 않는다는 말에도 고집을 부렸습니다.
몇 년 전부터 혈압이 높은데도 어떤 환자 분은 혈압약 먹기를 꺼려합니다. 체중 줄이고 운동하면서 조절해 보겠다는 의지를 보입니다.
물론 그런 노력으로 혈압이 목표인 수축기 140 미만, 확장기 85 이하로 떨어지면 괜찮지만, 그렇지 않은데도 “평생 약을 먹기 싫다, 오래 먹으면 부작용이 겁난다” 등의 이유로 안 드셨습니다. 그런데 혈압약은 안 드시겠다는 이 분이 혈액순환제는 약국에서 사서 꼬박꼬박 드시고 계셨습니다. 이 분에게는 혈압약 만큼 더 혈액 순환에 도움이 되는 약은 없는데도 말입니다.
꼭 먹어야 할 혈압약은 마다하고 필수적이 아닌 혈액순환제를 찾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필요 없는 항생제 처방을 요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필수적인 약은 먹지 많으면서 꼭 먹지 않아도 되는 약은 몸에 좋다니까 먹어보자는 이런 태도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이른바 ‘자연적인’ 방법을 선호하는 시대 조류에 따라 약물을 써서 조절하는 것을 강제적이고 인위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언짢아하는 분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특히 최근 몇 해 동안에 불거진 유명한 약들의 부작용 사례가 그런 인식을 더 부추긴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의학의 발전은 의료 기술과 약물 개발의 역사라고 할 만큼 합병증을 예방하고 조기 사망을 막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것도 바로 약입니다. 그래서 비록 자연적인 방법을 좋아하더라도 필수적인 약을 꼭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의사를 찾은 환자는 처방을 받고 싶어 하고 처방에는 투약만 있는 것이 아닌데도 거의 모든 환자는 약 처방을 원합니다. 만일 약을 받지 못하거나 주사를 맞지 못하면 치료를 제대로 못 받고 어딘가 손해 본 듯한 기분이 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의사 편에서 보더라도 왜 약이 필요 없는지 환자에게 길게 설명하기보다 처방전 발행이 훨씬 쉬운 길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처방전을 쓰고 차트를 덮는 것이 진료가 끝났으니 환자는 나가도 좋다는 암시를 담은 ‘의례’처럼 되어있기도 하지요. 이러다 보니 환자는 자신의 증상에는 언제나 약이 필요한 것이라는 인식을 갖게 됩니다.
따라서 만약 그 증상이 아주 사소하다 해도 비슷한 증상이 다시 생기면 으레 투약을 기대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의사의 처방 습관과 그에 길들여진 환자의 기대와 압력이 합작하여 불필요한 투약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또 우리 언어생활에 깊이 박힌 ‘약’에 대한 개념도 약 사용을 부추깁니다. 우리말 ‘약’에는 서양에는 없는 의미가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비유적으로 ‘몸이나 마음에 이롭거나 도움이 되는 것’이란 뜻입니다.
속담에도 있듯이 아는 게 병이요 모르는 게 ‘약’인 것이지요. 과거와 달리 요즘에는 약은 쓰기에 따라 약만이 아니라 독도 될 수 있는 강력한 화학물질입니다.
그런데도 아직 약이란 몸에 좋은 것이며 안 먹는 것 보다 낫고 먹으면 다 ‘약’이 된다는 인식이 꽤 있습니다. 항생제 남용으로 내성이 생긴 세균이 많아서 세균 감염 치료가 힘들어지는 예에서 보듯이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적정한 경우에 쓰지 않으면 자신 뿐 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에 해가 됩니다.
이런 문제는 오랜 세월에 걸쳐 쌓인 것이라 단번에 쉽게 깨뜨릴 수 없으나 언젠가는 넘어야 할 벽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의사의 처방을 단순한 ‘약’ 처방으로 그치지 말고 바로 ‘의사’ 처방으로 바꾸어 나가는 일입니다.
환자의 말을 잘 듣고 좋은 관계를 맺어 세심한 설명으로 이해를 구하고 안심시키는 ‘의사가 취하는 말과 행동’의 총체가 처방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합니다. 그런 노력이 명약 처방 이상으로 값지게 쳐주는 인식이 널리 퍼지게 하는 것이 어쩌면 더 중요한 일이겠습니다.
삼성서울병원 가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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