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이 9일 이학수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장(부회장)을 소환 조사함으로써 외형상 수사의 첫 걸음을 내디뎠지만 본격적인 수사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우선 삼성측의 입장이 예상보다 완강하다. 이 부회장은 도청테이프에 담긴 홍석현 당시 중앙일보 사장(현 주미 대사)과 그 같은 대화를 나눈 게 사실이냐는 검찰 신문에 “기억이 안 난다”“그런 말을 한 사실이 없다”고 대화 내용 자체를 부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부회장은 또 “도청테이프와 관련해 협박을 받고 국정원에 신고를 한 피해자임에도 검찰에서 조사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 참담하다”고도 했다.
이 본부장의 이 같은 태도는 어느 정도 예견된 것이다. 자신의 음성이 녹음된 테이프를 들이밀더라도 끝까지 부인해야만 검찰에게 수사의 빌미를 주지 않게 된다는 철저한 법리적 계산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불법 도청테이프 만으로 수사를 착수하는 데 검찰이 부담을 느끼는 상황에서 자신이 대화 사실을 시인하면 그 자체로 수사의 단서를 제공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설령 이 부회장이 도청테이프의 대화 내용을 인정하더라도 실제 돈을 전달하지 않았다거나, 지난해 대선자금 수사 때처럼 자금의 출처가 회사 돈이 아닌 이건희 회장 개인 돈이라고 주장할 경우 사법처리는 쉽지 않다. 참여연대가 고발한 배임ㆍ횡령 혐의를 모두 피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자신감 때문인지 삼성측은 공개되지 않은 나머지 도청테이프와의 형평성 문제를 벌써부터 제기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검찰이 증거수집을 위해 삼성그룹에 대한 압수수색 등의 강제수단을 동원할 것 같지도 않다.
이처럼 검찰의 입지가 애매해진 것은 법리적으로 도청테이프 내용 수사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정하지 못한 채 여론에 떠밀리듯 이 부회장 소환에 나선 탓도 크다.
김종빈 검찰총장은 사건 초기 대검 연구관에게 도청테이프를 단서로 수사착수가 가능한지 법리검토를 지시, 최근 보고서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으나 아직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않고 있다.
이 보고서는 이 사건이 위법하게 수집된 증거의 증거능력을 인정하기 어렵다는 ‘독수독과(毒樹毒果) 이론’의 적용대상은 아니라고 결론을 내렸지만, 도청테이프 내용을 수사할 경우 헌법상 사생활 및 통신비밀 보호라는 기본권 침해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는 점을 함께 지적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검찰 내부에선 수사 불가론이 우세한 것으로 보인다. 검찰 관계자는 “도청 테이프 수사에 대해서는 검찰이 어떤 식으로든 입장을 정리하고 넘어갈 수 밖에 없다”며 “조만간 총장이 결단을 내리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김영화기자 yaa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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