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산 윤이상 최승희 등 한동안 입에 올리는 것조차 조심스럽던 근현대사 인물들의 삶이 잇달아 영화로 만들어진다. 과거를 재조명하고 새롭게 평가하려는 최근 사회적 분위기의 부산물이라는 지적이다. ‘영화는 현실의 반영이다’는 말이 실감되는 대목이다.
중국에서 사회주의 독립 운동가로 활동하다 33년의 짧은 생을 마감한 김산(1905~1938)은 MK픽쳐스의 ‘아리랑’으로 부활한다.
지난 4일 국가보훈처의 건국 훈장 추서로 국가 유공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 그는 일본 첩자의 누명을 쓰고 총살당한 비운의 인물. 영화는 미국 여기자 님 웨일스가 20여 차례 그를 만나 저술한 소설 ‘아리랑’을 바탕으로 만들어진다.
이은 MK픽쳐스 대표는 “만들어야 할 영화이고 만들어질 때가 된 영화”고 말했다. 이 영화는 2001년부터 시나리오 작업에 들어갔다. 제작비는 40~60억 정도. 2006년 여름 촬영에 들어가 2007년 개봉을 목표로 하고 있다. 빨치산(‘남부군’), 베트남 전쟁(‘하얀 전쟁’) 등 민감한 소재를 주로 다뤄온 정지영 감독이 메가폰을 잡는다.
1967년 동베를린 사건에 연루되어 남한과 등을 돌려야 했던 세계적 작곡가 윤이상(1917~1995)의 삶을 담은 ‘상처 입은 용’은 남북한 – 독일 – 일본의 합작으로 만들어진다. 제작사 LJ필름은 유가족으로부터 영화 제작 위임장을 이미 받아둔 상태.
10년 전부터 영화화를 생각한 이승재 LJ필름 대표는 “북한측이 적극 지원을 약속해 북한 현지 촬영도 이뤄질 전망”이라며 “내년 초가 되면 많은 진척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2007년 크랭크 인을 목표로 심광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가 1차 시나리오 작업 중이며 제작비는 80억원이 들어갈 예정이다.
10년 전에는 TV드라마, 2년 전에는 연극으로 만들어졌던 무용가 최승희(1911~1969)의 일대기는 나우필름의 근대 여성 3부작(명성황후, 한국 여성 최초로 프랑스 사교계에 진출한 이심)의 첫 번째 작품으로 제작된다.
2006년 상반기 촬영을 목표로 시인 김선우씨가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광복이전 세계 무용계를 사로잡았던 최승희의 화려한 무대 인생과 친일 행적을 교차시키며 당시의 시대상을 담아낼 계획이다.
한때 금기시되던 3인의 이야기가 스크린으로 옮겨지는 것은 격동기 속에서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극적인 삶을 살다간 이들의 생애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소재이기 때문이다.
각 시대의 모습을 화면 속에 재현해 스펙터클의 묘미를 갖출 수 있다는 장점도 지니고 있다. 영화평론가 김영진씨는 “영화는 서사가 중요한 장르인데 실존 인물의 삶만큼 역동적인 것이 없다”며 “국내 영화계에 금기가 사라지고 산업의 규모가 커졌기 때문에 가능해진 일”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실미도’의 성공도 이들 작품 제작의 물꼬를 텄다는 시각도 있다. 영화평론가 심영섭씨는 “금기로 여겨지던 근현대사에 관객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실미도’를 통해 이미 상업적으로 증명되었다”며 “역사를 다루고 싶은 욕구와 제작사의 계산이 맞아 떨어진 결과”라고 지적했다.
제작사들은 자칫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삶을 살다간 3인을 영화화하는데 큰 걸림돌은 없다고 입을 모은다. 저작권 등 제작에 얽힌 법적 문제를 대부분 해결 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의 삶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각이 많이 변했기 때문이다.
다만 실존했던 인물을 다루기 때문에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이를 영화에 반영해야 하는 어려움이 만만치 않다. 오랜 시간 시나리오 작업에 매달리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나우필름 관계자는 “이들의 삶을 관객들에게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라는 관점을 정하는 것도 무시 못할 애로 사항”이라고 토로했다.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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