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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환 박사의 뉴스 속의 과학] 황소 1마리 vs. 닭 1,024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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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환 박사의 뉴스 속의 과학] 황소 1마리 vs. 닭 1,024마리

입력
2005.08.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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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필자가 한창 재미를 들인 분야 중에 ‘분자역학’이라는 것이 있다. 힘이나 열 등을 가하면 물체는 모양이 바뀌기 시작하는데, 얼마 만큼의 자극에 얼마 만큼의 변형이 일어나거나 혹은 찢어지는지를 연구하기 위한 노력은 수 백년 동안 계속돼온 물리와 공학의 연구 주제다. 이를 위해 과학자들은 물체를 작게 조각 내서 컴퓨터에 입력하고 수치적으로 이런저런 자극을 주는 실험을 해왔다. 요즘 들어 이 ‘조각’을 분자 단위까지 쪼개 실험하는 것이 가능해졌는데, 이를 ‘분자역학’이라고 한다. 이러한 일이 가능해진 배경에는 바로 ‘분산 처리의 발전’이라는 기술 혁신이 자리잡고 있다.

한 가지 일을 차례대로 수행하는 것, 예를 들면 한 손으로 밥을 먹고 그 다음에 같은 손으로 국을 떠 마시는 것을 직렬적 처리라고 한다. 반대로 한번에 여러 가지 일을 수행하는 것, 예를 들면 오른손으로는 밥을 먹고, 왼손으로는 동시에 반찬을 집어먹는 식의 처리를 병렬적 처리, 혹은 분산 처리라고 한다.

컴퓨터로 과학을 연구하는 방법에도 이처럼 두 가지가 있는데, 병렬적 처리가 아무래도 요즘 추세인 것 같다. 한 예로, 외계의 지적 생물체를 찾아내려 우주에서 날아들어오는 전파를 분석하는 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SETI 연구소는 몇 년 전부터 자발적 참여자가 제공하는 컴퓨터의 여가시간을 이용하고 있다. 연구소에서 잡아낸 전파를 분석하는데 전 세계 약 300만 대의 컴퓨터가 쓰인다.

그렇다면 한 대의 매우 빠른 컴퓨터로는 비슷한 수준의 해석이 불가능할까. 1년에 거의 두 배씩 빨라지는 컴퓨터의 처리 속도를 감안하면 이 같은 의문을 갖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진다. 이 질문에 대해 컴퓨터 공학의 선구자인 그레이스 머레이 하퍼는 “하나의 황소로 일을 해치우지 못한다면, 두 마리의 황소를 써야 한다”고 말했다. 당장 힘이 모자라면, 일하는 소의 마릿수를 늘이는 것이 합당하다는 이야기다.

반면 또 다른 컴퓨터 공학의 선구자 세이모어 크레이는 이에 대해 “당신이 밭을 갈고 있다면 1,024마리의 닭을 쓰시겠습니까, 아니면 두 마리의 튼튼한 황소를 쓰시겠습니까"라고 반박했다. 여러 마리의 ‘일꾼’을 쓰더라도 각 일꾼의 능력이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아무리 병렬로 일을 처리한다 해도 효율이 올라가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하퍼는 소프트웨어 분야의 선구자였고 크레이는 하드웨어 분야의 선구자였다는 사실이다.

교육개혁의 와중에 엘리트 교육을 고수하겠다느니(황소를 키우겠다), 평준화를 통해 교육의 기회를 넓히겠다느니(마릿수를 늘리겠다), 말이 많다. 정치권은 정치권대로 ‘혼자의 힘으로는 개혁이 어려워 연합을 해야겠다(마릿수를 키우겠다)’, ‘독자적인 노선을 구축하겠다(황소를 키우겠다)’는 등 논란이 어지간한 모양이다. 사회의 소프트웨어를 담당하는 정부는 한결같이 수를 키우겠다 하고, 하드웨어 격인 실무자들은 개체의 힘을 키우겠다고 한다. 과학계의 논란이 사회로 고스란히 이어지는 것을 보면 과학기술이 결국 인간이 하는 것이라는 점을 실감할 수 있다.

이 같은 논란의 와중에 우리가 간과하는 것은 인간의 능력이라는 것이 때로는 상상을 뛰어넘어 예측하지도 못한 성과를 내는 경우가 있다는 점이다. 컴퓨터 발전 초창기에 크레이나 하퍼가 닭이라고 생각했던 가정용 컴퓨터들은 황소처럼 힘이 세어져 버렸다. 우리가 집에서 사용하는 컴퓨터들은 20년 전이라면 슈퍼컴퓨터 축에 드는 연산속도를 자랑한다.

또 국가가 운영하는 연구실에서만 사용 가능하던 네트워크가 전 세계를 묶어 인터넷이라는 이름으로 발전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현대 과학은 ‘한 마리의 힘센 황소도 1,024마리의 닭도 아닌 1,024마리의 황소를 키우면 어떻겠는가’라는 답을 내놓은 셈이다.

요즈음 우리나라를 보면, 국민 모두가 황소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특히 젊은 세대의 거침없는 자기 주장과 민주화한 정치 인식이 그렇다. 정치도 예전의 ‘닭싸움’ 수준은 아닌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많은 논쟁은 ‘닭이냐 황소냐’와 연관돼 있다. 왜 황소 1,024마리를 앞에 두고 ‘어떤 한 마리를 골라 써야 할까’ 혹은 ‘이 황소들이 혹시 닭은 아닐까’ 고민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연세대 토목공학과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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