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김승규 국정원장의 도청실태 고백 기자회견 당시 언론이 ‘국민의 정부 시절 도청’ 사실에 천착하느라 그냥 지나친 대목이 있다. “지금은 장비가 없어 합법적 휴대폰 감청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언급이다.
김 원장은 “이것은 참 문제”라며 “국익을 위해서 어떻게 할 것이냐에 대해 국민 여러분도 균형 잡힌 생각을 가져주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휴대폰 감청을 위한 법적 뒷받침이 필요하다는 얘기였다.
배석했던 국정원 실장급 간부의 설명도 뒤따랐다. 그는 “2002년 3월 도청에 쓰일 수 있는 휴대폰 감청 장비를 완전 폐기한 이후 장비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며 “휴대폰을 합법 감청 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고 설명했다.
사실이라면 어이가 없다. 국가 최고정보기관이 2002년 3월 이후 3년이 넘도록 간첩이나 산업 스파이의 휴대폰을 통한 교신 내용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국가 안보는 물론 산업 부문의 정보전쟁이 국경을 초월해 격화하고 있는 시기에 우리 정보기관은 이에 대응할 기초 업무마저 수행하지 못한 꼴이다.
따지고 보면, 상황이 이렇게 된 일차적 책임은 국정원에 있다. 그 동안 국정원이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하지 못한 탓이다. 도청이라는 원죄 때문에 당연히 해야 할 일도 못하고 손발이 묶여버린 것이다.
김 원장이 합법적 감청의 필요성을 제기한 것은 원칙적으로 옳다. 그러나 국정원이 이런 권한을 되찾길 바란다면 먼저 국정원이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하며 거듭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국정원이 휴대폰을 합법적으로 감청할 수 있는 날은 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것은 국가적 불행이다.
정치부 정녹용 기자 ltre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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