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진씨. 28세. 2001년 고려대 독어독문학과 졸업. 중소기업(자동차 부품업체)에 취직했으나 영화가 하고 싶어 곧바로 그만두고 인터넷 공모를 보고 그 해 충무로로 뛰어 들었다.
그러나 연출부 막내를 자처한 영화 ‘광개토’ 는 투자자를 구하지 못해 제작이 무산되고 2002년 ‘굳세어라 금순아’ 부터 제작부 일을 시작했다. ‘늑대의 유혹’ ‘말아톤’ 을 거쳐 지금은 9월 말에 개봉할 ‘강력3반’ (감독 손희창)의 제작부장을 맡고 있다.
말이 부장이지 위로 프로듀서, 제작실장이 있고 아래로 세 명의 부원이 있으니 사실상 실무 담당이다. 그에게 실무란 장소섭외, 배우와 스태프의 숙소와 식사 챙기기에서부터 쓰레기 치우기까지의 온갖 뒤치다꺼리를 말한다. 촬영현장에서 무전기 들고 오가는 차량과 구경꾼을 통제하는 것도 그의 일이다.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경찰묘역에서 ‘강력3반’ 의 막바지 촬영이 있던 3일 아침. 전날 전주에서 촬영을 하고 밤 12시 30분에 도착한 그는 근처 여관에서 잠깐 눈을 붙이고는 오전 7시 다른 스태프보다 일찍 일어났다.
이날 촬영은 범인과 싸우다 순직한 한 주인공의 영결식. 비가 온다는 예보에 전주에서 이 영화의 마지막 촬영인 헬기액션 장면을 미루고 하루 앞당겨 촬영을 하게 됐다.
휴대폰으로 다시 한번 현충원측에 촬영허가를 확인하고, 미술팀과 필요한 소품들(천막 조화 영정 등)을 챙긴 김영진씨. 전날에 이어 다시 한번 제작부 막내인 임준혁씨에게 우비와 점심용 햄버거 준비에 차질이 없도록 일러놓고 현장에 도착했다. 그때가 오전 9시. 우선 현충원 관리담당부터 찾았다.
장소대여 시간을 확인하고, 천막과 의자를 빌리고, 미술팀과 조화와 영정을 배치하고 실물과 같은 돌로 만든 묘비를 세웠다. 그 사이 스태프가 마실 음료수도 도착했다. 살수차도 왔다.
오늘이 촬영일수로는 54일째이지만 날씨와 배우 스케줄로 쉰 날이 많아 촬영기간은 예정(석 달)보다 보름이나 늘어났다. 그러니 이젠 서로 말 안 해도 손발이 맞는다. 보기에 무질서한 것 같지만 그 속에 조화로움이 있다. 그 이유를 김영진씨는 이렇게 말했다. “목표가 하나이기 때문이죠. 정해진 시간 안에 찍자. ”
오전 11시, 살수차가 물을 뿌려대자 감독의 “액션” 소리가 나왔다. 김민준 장항선 남상미 등 주연 배우들이 비속에서 헌화를 했다. 늘 그렇듯 촬영현장을 지켜보는 일은 지루하다.
가장 좋은 장면을 위한 감독의 고민, 한 장면을 여러 각도(컷)로 찍기 위해 카메라와 조명이 자리를 옮기는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김영진씨도 한가해 보였다. “현충원이라 통제할 차량과 구경꾼이 없어서요. 그보다는 일의 특성 때문이죠. 모든 준비를 미리 해놓아야 하는 제작부는 촬영 전에 바빠야 합니다. 현장에서 바쁘면 무능한 거죠.”
그래도 신경을 곤두세우고 촬영에 방해되는 바닥에 버려진 물병, 우산 등을 치운다. 감독과 조감독이 나누는 다음 장면 촬영에 대한 이야기도 들어본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얼른 촬영장비를 덮을 비닐을 갖다 주고는 돌아선 그가 농담처럼 한마디 했다. “제작부가 아니라 제잡부.”
까맣게 탄 얼굴과 땀에 절은 옷. 집(경기 용인)에 못 가본 지 3주가 넘었다. 이렇게 해서 받는 돈은 제작부 몫 3,000만원 중 800만원. 막내는 그 절반인 400만원이다. 김영진씨도 막내 땐 그랬다. ‘굳세어라…’ 땐 200만원이었고, ‘늑대의 유혹’ 에서도 400만원이 고작이었다. 싫다고 뛰쳐나오면 어디에서도 일하기 힘들다.
아직도 도제시스템이 남아있는 충무로에서 스태프는 단독으로 계약하지 못하고 팀으로 계약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일년에 두 편이라도 할 수 있다면… 사정이 이런데 그는 왜 영화판에 있는 걸까. 그것도 번듯한 대학까지 나와서. 대답은 한마디. “영화가 좋아서.”
이처럼 충무로에는 “돈 안받아도 좋다, 영화만 하게 해 달라” 며 밑바닥부터 시작한 젊은 영화인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영화 현장이 곧 행복’ 이다. 그들에게는 꿈이 있다. 대학에서 영화소모임까지 만들어 활동한 김영진씨도 4, 5년 후에는 하고 싶은 작품 기획해 만드는 프로듀서가 되는 희망을 갖고 있다.
배우의 부상으로 촬영은 늦어지는데 장소를 빌려준 미술관측에서는 빨리 끝내라고 성화일 때, 중간에 끼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 때려치우고도 싶었지만, 그래도 영화가 극장에 걸릴 때의 보람과 미래의 꿈이 그를 붙잡는다고 했다. 이따금 그 꿈을 충무로가 저임금의 수단으로 악용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렇다면 최근 불거진 스타 고액출연료에 대한 생각은 어떨까. “물론 흥행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겠지만, 한 배우의 출연료가 전체 스태프의 임금보다 많은 것은 분명 지나치다.
그런데 문제는 배우 출연료를 줄인다고 해서 영화제작비가 줄어들거나 그 돈이 스태프 처우개선에 쓰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데 있다.”
그는 적어도 현장에서 배우는 모두 같다고 했다. 오히려 스타가 아닌 배우들이 더 인간적이며 촬영진행도 잘 이끌어가 살갑다고 했다. ‘강력3반’ 의 배우들도 예외가 아니라고 했다. 김민준은 전날 윤태영과의 격투에서 턱을 다쳐 일곱 바늘이나 꿰매고도 군말 없이 촬영장에 나오고 남상미는 처음부터 끝까지 신인배우의 자세를 보여 스태프를 감동시키고 있다고 했다.
촬영이 끝난 시간은 오후 5시. 12시부터 쏟아진 폭우로 예정보다 두 시간 늦었다. 비오는 장면을 비오는 날 못 찍는 것도 영화의 아이러니. 촬영팀은 서둘러 짐을 꾸려 전주로 향했다.
이때부터 김영진씨는 바빠졌다. 한 시간에 걸쳐 제잡부답게 빠뜨리고 간 장비는 없나 확인하고 쓰레기까지 말끔히 치운 뒤 현충원 관리담당을 찾아 현장복원을 확인받고서야 마지막으로 자리를 떴다.
다음 작품이 궁금했다. “제작부는 촬영 끝났다고 끝난 것 아니예요. 후반작업 때도 편집실 진행을 도와야 해요. 스태프는 배우처럼 겹치기가 안돼요. ”
이대현대기자 leedh@hk.co.kr
▲ 이력
- 고려대졸업후 중소기업 취직
- 영화가 좋아 충무로에 투신
- ‘굳세어라 금순아’‘말아톤’ 이어 4번째 영화 제작부장
▲ 하는일
- 장소섭외·배우스태프 숙소 예약
- 촬영장 차량·구경꾼 통제
- 점심식사·온갖 소품 챙기기
- 촬영후 쓰레기 치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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