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차례 번호가 바뀌어온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의 휴대폰은 9일에도 끝내 응답하지 않았다. 온 나라가 도청 문제로 떠들썩해진 이후 그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철저히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안기부 X파일 사건이 처음으로 터져 나왔을 때 그의 첫 반응은 “미림팀? 금시초문인데”였다. 그는 1983년부터 안기부에 몸담아왔다. 대공수사국장을 거쳐 미림팀이 재건되던 94년 6월에는 정보분석을 담당하는 기획판단국장을 지냈다. 그 해 12월부터 95년 2월까지는 국내정보를 총괄하는 안기부 제1차장을 지냈다.
그의 이력은 “미림팀이 뭐냐”는 엉뚱한 되물음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안기부 도청의 내막을 가장 잘 알 수 있었고, 도청을 지시하고 보고받는 라인 위에 서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이전에도 침묵한 적이 있다. 국민의 정부 임기 내내 국정감사 때면 휴대폰 도청 여부를 두고 여야 공방이 벌어졌지만 그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러다 대선을 목전에 둔 2002년 9월, 그는 한화 김승연 회장과 청와대 관계자의 통화, 이근영 금감위원장과 이귀남 대검 정보기획관의 통화 자료를 잇달아 내놓았다.
11월과 12월 김영일 사무총장 등이 폭로한 정치인, 기자 등의 전화 도청 자료도 그를 통해 나왔다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다. 이후 그는 “휴대폰도 도청이 된다”며 도청 공세의 선두에 섰으며, 국회 정보위에서 당시 신건 원장에게 “대선 후 온전하지 못할 것”이라는 으름장까지 놓았다.
그렇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한나라당이 대선에 패한 뒤 그는 다시 침묵에 들어갔다. 그가 촉발한 국정원 도청 의혹 사건을 다루는 재판정이 그를 증인으로 불렀지만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를 향한 시선은 곱지 않다. 여야를 막론하고 “진실이 아닌 시류에 편승, 도청 논란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만 했다” “정치인으로서 비겁하다”는 비난이 나온다. “도청의 장본인격인 정 의원이 도청을 물고 늘어지는 것을 보면서, 한국 정치의 이중성에 환멸을 느꼈다”는 일부 여당 의원들의 격한 반응도 있다.
그는 도청의 피해자 행세를 했다. 6~7개의 휴대폰을 바꿔 다니고 고가의 도청방지 장치까지 구입해 썼다고 한다. “국정원이 내가 호텔에서 식사할 때 대화도 도청하고, 나와 기자와의 통화를 도청한 녹취록도 있다”며 자신을 도청 피해자라고 부각시키기도 했다.
그는 17대 국회 들어 변신을 시도해 왔다. 보건복지위에 적을 두고 ‘복지분야’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활동하는 모습도 보여주려 했다.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국민 우선의 열린 정치를 구현하고 싶다”는 포부도 밝히고 있다. 하지만 자신부터 열지 않고 ‘열린 정치’를 하겠다는 말은 헛구호에 다름 아니다. 이제 정 의원이 자신이 알고 있는 과거 도청의 진실부터 국민 앞에 고해해야 할 때다
이동훈기자 dhle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