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의 발표대로 2002년 3월 이후 불법 도청이 사라졌더라도 국정원이 편법으로 감청할 수 있는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 현행 통신비밀보호법 및 제도상의 허점 때문이다.
■ 전화번호 끼워넣기
정보기관이 감청을 하려면 고법 수석부장판사가 발부한 감청허가서를 통신사업자에게 제시해야 한다. 통비법상 정보기관의 감청은 국가안전보장에 상당한 위험이 예상되는 경우로 제한(제7조)된다. 그러나 감청 허가를 내주는 판사가 정보기관이 제시하는 전화번호와 해당 사건의 관련성을 일일이 확인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정보기관은 국가안보 사건과 관련이 없는 전화번호를 끼워넣어 감청허가를 받아낼 수 있다.
실제로 국정원은 지난해 감청허가서 1장에 평균 10개의 전화번호를 포함시켜 감청에 사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2002년에는 감청허가서 1장에 평균 전화번호가 2.96개이던 것이 2003년에는 6.03개로 늘었다. 공교롭게도 국정원이 불법감청을 중단했다고 주장한 2002년 이후 감청허가서에 포함된 전화번호 숫자가 계속 증가한 것이다.
서울고법 형사수석부장을 지낸 한 인사는 “허가서 1장에 전화번호가 여러 개 기재돼 있는 경우 주변인물이나 관련자 전화도 빠짐없이 감청하겠다는 뜻으로 짐작할뿐 사건과의 관련성을 확인할 방법은 없다”고 말했다.
국정원이 수사하는 공안사건은 줄고 있고 국내정보 활동을 위한 인원과 기구도 축소됐는데 오히려 감청 조회는 크게 늘어나고 있다는 점도 편법 감청의 의심을 낳고 있다.
■ 당사자 통보 규정 유명무실
감청 대상자에게는 30일 이내에 감청 종료 사실을 통보해야 한다. 하지만 ‘국가의 안전보장 및 공공의 안녕질서를 위태롭게 할 현저한 우려가 있는 때에는 통지를 유예할 수 있다’는 예외 규정(제9조의2 ④항)이 있어 편법 감청을 부추긴다는 지적도 있다. 예를 들어 국정원이 간첩 혐의를 받고 있는 A씨와 친분이 있는 정치인 B씨를 감청해 B씨의 혐의가 없는 것으로 확인됐더라도 예외 조항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B씨에게 감청 사실을 통보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정보기관이 감청기간을 연장하는 방식으로 아무런 혐의가 없는 B씨를 대상으로 불법 감청을 해도 이를 막을 방법이 마땅히 없다. 국정원은 1회에 4개월까지 감청을 할 수 있고, 1차례 연장하면 최대 8개월까지 가능하다. 국정원 감청전담 부서인 과학보안국 국장을 지낸 한 인사는 언론 인터뷰에서 “본인의 반발 등을 우려해 정보기관이 감청 종료 사실을 통보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감청허가서 집행기간을 연장해 감청의 필요성이 없어졌더라도 계속 감청을 해왔다”고 증언했다
김영화 기자 yaa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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