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역사상 가장 긴 경제적 번영을 누리고 있는 데에는 앨런 그린스펀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의 힘이 크다. 그의 정제된 말 한마디는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 경제의 흐름을 조절하는 신호등과 같은 역할을 한다.
‘그린스펀이 말하면 시장은 듣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경제에 대한 그의 영향력은 조지 W 부시 대통령을 앞서며 미 의회도 그의 능력을 존중하여 연임을 위한 법안을 추진하려고까지 하였다.
유감스럽게도 한국에서는 그와 같은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임기가 보장되어 있는 한국은행 총재에게 물러나라고 하는 얘기가 국회 상임위에서 나오는가 하면, 정부 경제정책의 수장(首長)이라고 할 수 있는 경제부총리의 말이 뒤집혀지는 경우도 종종 있다.
한국 경제의 중요한 현안인 부동산에 대한 대책이 전문가인 건설교통부나 재정경제부가 아니라 총리실과 청와대나 여야 정치권을 중심으로 마련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정치논리 앞서면 경제 실패
경제학이 태동할 당시 정치경제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진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경제정책에는 정치적 요소가 작용한다. 선거 전에는 경기를 부양하고 선거 후에는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긴축을 한다는 정치적 경기변동론도 있다. 그러나 정치논리가 경제를 지배한 나라는 역사적으로 실패하였다.
또한 국경을 초월하여 경제활동이 이루어지는 세계화 시대에 있어서는 국내 정치의 틀에서 벗어나 국제 경제 환경에 적응하고 이를 잘 활용할 수 있는 정책이 한층 더 요구된다.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위안화 환율 책임자인 저우샤오촨 중국 인민은행장을 만나 본 적이 있는데 선진국의 경제학자와 다를 바 없는 시장경제에 대한 소신과 금융에 대한 철학을 능숙한 영어로 설명하는 것을 보고 큰 인상을 받았다.
국가의 주요한 결정이 공산당 정치국으로 대표되는 당 지도부에서 이루어지는 사회주의 체제이지만 저우 행장과 같은 전문가의 능력이 존중되고 발휘될 수 있기 때문에 중국의 개혁ㆍ개방 정책이 결실을 거두고 있는 것이다.
참여정부는 분권형 국정 운영이라는 목표 하에 정치인 출신 총리와 장관을 포함한 여러 사람에게 책임을 나누어 주었다. 과거 경제부총리가 청와대 경제수석과 짝을 이루어 경제는 물론 이와 관련된 복지ㆍ노동ㆍ환경 분야를 통합ㆍ조정하던 경험에 비추어 보면 큰 차이가 있다.
권위주의 시대의 산물이라고 여길지 모르지만 미국에서도 행정부의 경제정책은 존 스노 재무장관과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CEA) 의장 등이 담당하고 딕 체니 부통령 등은 거의 관여하지 않는다. 경제는 복잡하고 섬세한 시장의 원리에 따라 움직이는 고도의 전문가 영역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늦은 감이 있지만 최근 노무현 대통령이 경제정책의 컨트롤타워는 경제부총리라고 정리를 한 것은 다행이다. 시장이 이에 대한 믿음을 가지도록 실질적인 힘을 실어주어야 할 것이다.
경제활동의 주역이자 실제적인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기업의 기를 살리는 것도 중요하다. 수도권 규제와 같은 기업 활동에 대한 제한은 과감히 풀고 각종 준조세나 부담금을 정비하여 투자를 확대하도록 유도하여야 한다.
●기업규제도 과감히 풀어야
내년 중반에는 지방선거가 있고 그 다음 해에는 대통령 선거가 있다. 정치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선거 준비를 위한 시간이 촉박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경제를 회복시키는 일은 선거보다 더욱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다.
미국과 중국은 경기 과열을 우려하여 금리 인상과 같은 긴축 정책을 실시하고 있는데 그 여파가 우리에게 밀어닥치면 영영 불황의 터널을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부와 민간을 막론하고 경제전문가의 역할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현정택 인하대 국제통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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