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시골에서 태어났고 위에 언니, 오빠가 있다. 시골에서 할머니와 4살까지 살았다. 엄마, 아빠 없이……. 3살 때 부모님이 와서 언니, 오빠를 데려가는데 나만 빼놓고 차에 탔다. 나는 떠나가는 차 꽁무니만 보면서 목청이 터져라 울었다. 몇 년이 지난 뒤 엄마, 아빠가 나를 찾아왔을 땐 너무 서먹했던 기억이 난다. 그 때 엄마, 아빠가 참 미웠다.”(여고 3학년생)
“나에 대해 자각할 수 없는 2~4세 정도로 생각된다. 그 땐 우리 집이 가난해서 동생이 태어나자 난 이모집에서 키워졌다. 거기에서는 맞은 기억 밖에 없다. 그래서 지금도 큰이모네 누나 형들을 보면 상대하고 싶지 않다.”(남고 2학년생)
두뇌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하면 사람들은 대개 3~4세 이전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한다. 대뇌 기억 중추의 한 부분인 해마가 완전히 완성되지 않은 까닭이다. 그러나 부모의 격렬한 싸움이라든가 동생에게 사랑을 빼앗긴 일 등 일부 경험은 또렷한 기억으로 남기도 하는데, 4세 전후 어릴 적의 실망 기억으로 아이들이 가장 많이 손꼽은 것은 바로 ‘부모와의 격리’였다.
엄마와 격리되어 키워지는 아기의 경우 양육자와의 애착(愛着) 형성이 불안정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 통설이다. 친근한 존재(엄마를 대리하는 ‘양육자’도 포함됨)와의 애착 형성은 아이의 성장발달과 학습에 중요한 토대가 되는데, 애착의 안정성 정도에 따라 정서와 사회성의 발달 및 양상에 큰 차이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정적인 애착’은 젖을 물린 엄마(양육자)의 부드럽고 따뜻한 시선, 아기를 안심시키는 자상한 말, 젖은 기저귀를 갈아주는 세심한 손길 등의 일관된 보살핌을 통해 아기가 편안함과 즐거움을 느낄 때 강화된다. 반면, 양육자가 어떨 때는 열정적으로, 어떨 때는 무관심한 식으로 기분에 따라 일관성 없이 대하는 경우에는 ‘저항 애착’이 형성된다. 이 경우에 아기는 엄마의 관심을 끌기 위해 울고불고 매달리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소득이 없을 때에는 슬픔과 분개심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엄마를 피하려고 하는 ‘회피 애착’은 아기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자주 표현하고, 친밀한 접촉에는 매우 인색할 때 나타난다. 엄마가 자기중심적으로 지나치게 떠들어대면서 과도한 자극을 줄 때에도 ‘회피 애착’이 형성된다. 한편, 승인과 학대를 반복하는 경우에는 아기가 엄마에게 끌리면서도 공포감을 함께 느끼기 때문에 접근하다가도 멍하니 얼어붙거나 멀찍이 피하는 ‘혼란한 애착’이 형성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심리분석 이론가나 동물행동학자에 의하면 안정적인 애착으로부터 세상에 대한 신뢰와 정서적인 안정감을 얻은 아이는 건강한 심리적 발달을 지속한다고 한다. 유치원에서도 자기지향성을 바탕으로 또래들을 주도하는 한편 호기심과 배우려는 열의가 가득하며, 문제해결력이 높고 창의적이라는 것이다. 반면, 저항ㆍ회피ㆍ혼란과 같은 불안정 애착이 형성된 아이들은 사회적ㆍ정서적으로 위축되고, 놀이장면에서 다른 유아를 끌어들이는 것을 주저하는 것으로 관찰되었다.
의사와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극도로 열악한 보육원에서 먹고, 입고, 자는 것 이외의 다른 상호작용을 받지 못한 아이의 경우에 시간이 흐를수록 울지 않고, 소리도 내지 않으며, 경직되어 있거나 우울한 표정이 된다고 한다. 또한 모성박탈을 경험하거나 양육자의 따뜻한 애정이 결핍된 아이들은 이후 아동기나 청소년기에도 그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는 것이 지배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초기 박탈을 경험한 아이들일지라도 애정이 많고, 반응이 긍정적인 양육자들로부터 많은 관심과 보살핌을 받게 된다면, 점차 핸디캡을 극복할 수 있다는 보고도 있다. 최근 맞벌이 부부가 늘면서 아이를 보모나 친척, 혹은 탁아시설에 맡겨야 하는 부모들은 여러 가지 걱정이 많을 수밖에 없다. 비양심적인 보육시설 기사가 불러일으키는 노심초사는 차치하고라도, 아이를 곁에 두고 살뜰히 돌보지 못하는 것도 미안한데 부모와의 격리로 인한 박탈감마저 느끼게 한다면 부모 노릇을 근본적으로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을지도 모르겠다.
다행히도 아이가 좋은 탁아시설에서 질 높은 보살핌을 받았을 때에는 엄마에 대한 안정 애착도 함께 발달되었을 뿐 아니라 가정에서 돌본 유아와 같은 수준의 사회적, 정서적, 지적 성장을 보였다는 보고가 있다. 스웨덴에서는 질 높은 탁아시설에 맡겨진 아이들이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더 우수한 지적 발달을 보인 사례도 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양육자의 태도이다. 부모가 세심하고 일관성 있는 애정을 기울여 자녀가 안정적인 애착을 갖게 되었을 때에는 이를 토대로 건강한 심신의 발달을 이룰 수 있다. 반면 부모가 심리적으로 불안정하거나 변덕스럽거나 자주 우울하여 비일관적인 태도를 보일 때 자녀들은 불안정한 애착을 형성하게 되고 이후의 건전한 성葯?어려워진다.
한편 아이 엄마가 직업 갖기를 희망하는데 육아를 위해 집에 있어야 한다고 남편이나 주위 사람이 압박을 가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상담자들은 조언한다. 엄마를 대리할 수 있는 양육자나 좋은 보육시설이 있는 경우라면 취업한 엄마의 행복감이 자녀에게도 전이되어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자녀와 함께 있는 시간 동안은 만족스러운 접촉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신규진ㆍ서울 경성고 전문상담교사ㆍsir90@chollia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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