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에게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this man’이라고 불러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노벨평화상까지 받은 연장자인 김 전 대통령에게 부시가 ‘이 양반’ 혹은 ‘이 사람’ 정도로 번역되는 호칭을 썼다고 당시 언론들은 크게 다뤘다.
일부 언론은 한미관계 악화의 조짐이란 말까지 했고, 미국 외교라인은 부시는 아버지한테도 ‘this man’이라고 부른다면서 부랴부랴 진화에 나섰다.
부시 대통령은 작년 말 미국을 방문한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에게도 ‘this man’이라는 표현을 썼다. 블레어 총리와 같은 시기에 (‘at the same time this man holds the Prime Ministership’) 미국 대통령이 된 자신을 운 좋은 사람이라고 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서거했을 때 미국 방송 매체들은 교황을 ‘this man’으로 불렀다. 기독교에 기초한 건국이념과 많은 가톨릭 교도가 있는 미국에서 며칠 밤낮을 생방송으로 서거한 교황을 ‘이 사람’이라고 부르는 몰상식한 일이 벌어졌지만 시청자들의 항의는 없었다.
●교황에게도 'this man' 호칭
영어에는 존칭이 따로 없는 경우가 많고 문맥으로 이해해야 할 때가 있다. ‘this man’은 ‘이 사람’과 ‘이 분’의 의미를 함께 갖는다. 교황을 지칭하거나, 다른 나라의 수반을 초청한 자리에서 사용됐다면 이는 당연히 존칭의 의미이다.
한 가지 더 예를 들자. 노무현 대통령과의 첫 정상회담에서 부시 대통령이 노 대통령을‘an easy man to talk to’라고 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이는 ‘말하기가 쉬운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 ‘무슨 말을 하는지 내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사람’ 혹은 ‘복선을 깔지 않고 자신의 의사를 간단 명료하게 표현하는 사람’으로 ‘말이 잘 통하는 상대’라는 뜻이다. 예, 아니오가 분명한 사회에서 누군가 나를 그렇게 부른다면 이는 깔보는 말이 아니라 칭찬하는 말이다.
일방적 의사 전달인 ‘talk to’ 대신 ‘함께 대화한다’는 의미인 ‘talk with’를 썼어야 했다는 주장도 별 신빙성이 없다. ‘talk with’ 보다는 ‘talk to’가 월등히 많이 사용되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두 사건은 사소한 에피소드로 끝날 수 있었지만, 부시에 대한 반감이 한국 국민들 사이에 증폭됐고 반미감정으로 확대 재생산됐다. 심지어 부시가 고이즈미 일본 총리를 만나면 늘 첫 마디가 ‘내 친구(my friend)’라며 한국의 위상을 스스로 폄하하는 일까지 있었다. 하지만 맨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상대방을 ‘내 친구’라고 할 사람은 흔치 않다.
앞으로도 유사한 일이 발생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한미 정상이 실질적인 논의보다 ‘this man’이나 ‘easy man’을 먼저 떠올려야 한다면 국가적으로도 큰 손실이다.
우리 사회에 절실히 필요한 것은 대화의 기술, 특히 상대방의 말을 듣는 기술이다. “분열한 나라치고 불행에 빠지지 않은 나라가 없다”라고 노 대통령이 말한 적이 있다. 옳은 말이다.
분열은 상대방의 말을 듣지않고 내 주장만을 앞세우는 데서 시작된다. 심지어 상대방이 옳다는 게 밝혀진 후에도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나는 ‘바담 풍’ 하면서 남에게 ‘바람 풍’ 하라는 것도 문제지만, 남이 ‘바람 풍’ 하는데도 ‘바담 풍’ 한다고 비난하는 일이 다반사다.
●상대방 진의 왜곡 도움안돼
인터넷이 발달한 현대사회에서는 듣는 기술이 절실히 필요하다. 사소한 말로도 오해가 생기고 이는 급속히 전파된다. 자신에게 필요한 부분만 골라 상대방의 진의를 왜곡하는 일이 흔한 시대에, 전체를 보고 상대방을 이해하는 풍토가 아쉽다.
우리 각자가 안데르센 동화에 나오는 ‘쇠똥구리’처럼 남을 무시하고 깍아내리려는 이기적이고 자아 도취적인 모습은 없는지 생각해 봤으면 한다.
김민숙 미 로드아일랜드주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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