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폭 한국인은 더욱 차별을 당해 병을 숨긴 사람도 많았습니다.”
일본 히로시마(廣島)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날 강문희(86)씨는 폭발지점에서 수십㎞ 떨어진 미쓰비시 조선소에서 사무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운 좋게 직접적인 피해는 당하지 않았지만 아버지와 남동생을 모두 잃었다. 하지만 진정한 고난은 그 뒤 시작됐다. 전승국민도 패전국민도 아닌 신분에서 구호의 사각지대에 놓였기 때문이다. 강씨는 5일 “약도 없고 차별마저 당할 바에는 한국에 돌아가서 죽겠다고 무작정 귀국한 사람이 많았다”고 회고했다.
히로시마에서 인류가 처음 핵폭격을 당한 지 6일로 60주년을 맞았다. 평화공원을 중심으로 히로시마 시내 곳곳에서는 일본이 세계 유일의 피폭 민족임을 강조하는 행사가 열렸다. 폭발 직후 사망한 시민은 인구의 절반 가까운 13만5,000여명으로 추정된다.
히로시마에 생존하고 있는 피폭 한국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핵폭탄이 떨어진 1945년 8월6일 당일 약 8만7,000여명의 한국인이 히로시마시 인근에 있었다. 이 지역은 군수공업지대로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강제 징발된 노동자들이었다. 이날도 아침부터 동원돼 작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피해가 특히 심했다고 한다. 결국 2만8,000여명의 한국인이 무고하게 숨졌다는 게 관련단체의 집계다.
한국인은 일본을 제외하고 세계에서 가장 피해자가 많은 피폭 민족이지만 여전히 구호와 보상에선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현재 ‘건강수첩’을 보유, 일본 당국의 지원을 받고 있는 한국인 피폭자는 1,700여 명에 불과하다. 피해자 상당수는 일본 본국을 직접 방문해 수첩을 발급 받도록 한 규정 때문에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
피폭 생존자들은 최근 한국 사회에 확산되고 있는 ‘핵무기 불감증’에 대해서도 크게 걱정하고 있다. 강씨는 “북한 핵에 대한 정부 대응을 보면 피부가 녹아서 떨어지는 핵무기의 무서움을 아직도 모르는 것 같다”면서 “핵전쟁에서 수만명의 희생자를 낸 나라답게 핵전쟁을 막기 위한 각오를 가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히로시마=김철훈 특파원 ch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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