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시대, 어느 정권에서나 정보는 힘이었다. 그 정보가 지금 문제되는 것처럼 도청을 통한 정확한 내용이라면 그 위력은 가공할 만 했다.
정보를 쥔 자가 재계 인사나 정치인에게 “요즘 말이 많습디다”라고 하면, 당사자는 밤잠을 설쳐야 했다. 장관이, 재계 총수가 “말이 많다”는 한마디에 허리를 굽신거리는 것을 보면서, 정보를 장악한 자는 대단한 쾌감을 느꼈을 것이다. 쾌감만 있었겠는가, 좋은 관계라는 미명아래 돈과 향응도 따라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 끝은 좋지 않았다. 유신 정권 시절 비명횡사한 차지철 전 경호실장, 프랑스 어디선가 사라진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은 그 대표적인 예다.
전두환 정권의 장세동 전 경호실장, 노태우 정권의 박철언 전 의원, 김영삼 정부의 김현철씨 등도 결국 감옥에 갔다. 정보와 권력에 탐닉할수록 피해를 입고 원한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져 그 업보가 단죄로 되돌아왔던 것이다.
6공 때 청와대 사정을 맡다가 김영삼 정부 때 국회에 입문한 한 정치인은 처음에는 적응이 안됐다고 한다. 어떤 의원이 개혁을 외치면 그가 숨겨놓은 재산목록이 떠오르고 다른 의원이 도덕성을 외치면 그가 밀회하는 여인이 생각났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이런 정보를 사용하는 것은 정치적 자살행위라고 판단, 머리 속을 비웠다고 한다. 그는 지난 대선 때 불법 대선자금으로 구속될 때까지는 비교적 순탄한 정치생활을 했다.
정보의 위험성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를 보자. 김영삼 정부 초기 실세였던 한 중진의원은 안기부 보고서를 받아보곤 깜짝 놀랐다. 거기에 자신에 대한 내용이 있었는데 도청정보가 아니었던지 상당부분 틀렸기 때문이다. 그는 곧바로 안기부에 “그 많은 돈을 쓰면서 틀린 정보나 올리느냐”고 항의했고 “주의하겠다”는 답을 들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보고서의 나머지 부분을 읽은 그는 얼마 후 한 재계 인사를 만났을 때 안기부 보고서에 담겨있던 그에 대한 좋지않은 정보가 떠올랐다고 한다. 자신에 대한 정보가 틀렸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에 대한 정보는 사실처럼 각인돼 있었던 것이다.
지금 YS정부 시절 안기부 미림팀이 도청한 테이프 274개의 처리여부를 놓고 말들이 많다. 온갖 명분론과 법논리가 난무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 테이프에 가까이 간 사람들은 다치기 쉽다는 점이다.
테이프 내용이 세상을 뒤흔들 정보이고, 그 정보를 접한 자는 엄청난 힘을 갖게 되지만 그 순간 자신도 예리한 칼 날 위에 서있게 된다. 소설로, 영화로 공전의 히트를 한 ‘반지의 제왕’에서 절대반지를 손에 넣은 자들이 반지의 엄청난 힘을 제어하지 못하고 파멸하는 것처럼 도청테이프도 그런 파괴력을 갖고 있다.
따라서 도청테이프는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 테이프를 듣고 선별적으로 수사하겠다는 식의 발상이나 공개가 유리하냐, 불리하냐는 얄팍한 정치적 셈법은 그야말로 절대반지의 마력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짓이다.
이 기회에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아 나라를 바로세우자는 게 국민의 뜻이라면, 법적 절차를 완비해서 테이프 내용을 모두 공개하고 검증해야 한다.
그러나 지나간 일로 나라가 발목 잡혀서는 안 된다는 공감대가 형성된다면, 이미 공개된 테이프를 뺀 나머지 테이프들은 덮어야 한다. 어떤 경우든 선별적 공개나 선별적 수사는 안 된다. 우리 사회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는 불복과 대립, 의혹의 대혼란을 야기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영성 정치부장 leey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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