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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 파문/ "DJ초기엔 도청 힘들어 99년 千원장 부임후 재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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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 파문/ "DJ초기엔 도청 힘들어 99년 千원장 부임후 재개"

입력
2005.08.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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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정부는 임기 내내 야당과 도청 공방을 벌여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야당은 휴대폰 도청 의혹을 끊임없이 제기했고, 국민의 정부는 “도청은 있을 수 없다”고 맞서왔다. 그런 면에서 “DJ정부에서도 4년간 휴대폰을 포함한 도청이 있었다”는 국정원의 5일 고백은 큰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취임 직후인 98년 5월 안기부를 방문한 DJ는 “내가 중앙정보부와 안기부의 희생자 대표”라며 “도청 미행 감시 고문을 반드시 없애달라”고 주문했다. 클린 정보 기관을 표방하며 명칭도 국정원으로 바뀌었고 초대 원장에 이종찬씨가 앉았다. 당시 국정원 관계자들은 “초기엔 도청을 하기 힘든 분위기였다”고 회고했다. 이 원장이 정치관련 보고서를 들고 갔다가 DJ에게 야단 맞았다는 얘기가 당시 분위기를 짐작케 한다.

국정원의 도청 재개는 99년 5월 천용택 국정원장 취임을 전후해서라는 게 국정원 관계자들의 일치된 증언이다. 16대 총선(2000년 4월)을 앞둔 시점이었다. 여권 내에서 국정원의 정치적 역할론이 나오기 시작했고 국정원은 도청으로 자신들의 정보능력을 향상시키려 했다. 그 해 12월 이동식 휴대폰 감청장비 20세트가 개발돼 본격적으로 휴대폰 도청이 시작됐다는 국정원 발표와도 일치한다.

천 원장이 DJ의 삼성 대선자금수수 발언 파문으로 경질된 뒤 국정원장 바통은 임동원씨로 넘어갔다. 당시 국정원 관계자는 “임 원장은 남북정상회담 때문에 국내정치에는 신경을 쓸 겨를도 없었다”며 “도청은 99년 6월 부임한 국내 담당 엄익준 2차장과 이어진 김은성 2차장이 전담했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신건 원장 취임 1년여가 지난 2002년 3월. 대선 정국이 서서히 요동치면서 휴대폰 도청 의혹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신 원장은 통신비밀보호법이 발효되고 국민적 의혹이 커지자 도청을 담당한 과학보안국(8국) 국장을 불러 해체를 지시했다. 8국의 인력과 장비는 외사방첩국과 대공수사국 등 안보 관련 부서로 이관됐다.

이관이 마무리 될 무렵인 10월, 공교롭게도 국회에서 도청 공방은 정점으로 치닫는다.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이 당시 이근영 금감위원장과 이귀남 대검정보기획관의 통화 내용을 폭로하면서 휴대폰 도청 의혹을 제기했다. 김영일 사무총장 등이 잇달아 폭로자료를 내놓았고 대선정국은 도청 공방에 휩싸인다.

1차 도청자료는 그해 3월 국회의원, 언론사 사장, 취재기자 간의 통화내용을 담아 놓았고 2차 도청자료에는 급기야 박지원 비서실장 등 여권인사마저 등장했다. 의혹은 일파만파로 커졌다. 한나라당은 2차 폭로 때는 “국정원이 휴대폰 도청장비를 개발, 자동차에 싣고 다니며 도청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국정원 발표로 사실로 밝혀졌다.

하지만 국정원은 “현 정부 들어서는 일체의 불법도청을 하지 않았다”고 부인했다. 신 원장은 “한나라당 공개 자료는 괴문서”라고 일축하는 한편 “8국은 이미 해체됐다”고 맞섰다. 한나라당도 물러서지 않았다. 김영일 총장의 말대로 ‘누구 하나가 죽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 같은 벼랑끝 공방은 그해 12월 대선에서 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승리하면서 흐지부지된다. 그리고 2년여의 세월이 흘러 참여정부의 국정원은 당시 한나라당의 의혹 제기가 상당부분 사실이었음을 확인해줬다

이동훈기자 dh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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