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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아오이가든 - 피로 물든 세상…'착한' 관념을 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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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아오이가든 - 피로 물든 세상…'착한' 관념을 깨라

입력
2005.08.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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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어미가 다리를 벌리고 서 있고, 그 어미의 가랑이 사이에서 머리통이 서서히 …. 찢어지는 어미의 가랑이를 눈으로 보면서, 고통으로 일그러진 어미의 눈동자와 시선을 맞추며, 그 가랑이에서 흘러나오는 피에 갓 뜬 눈을 흠뻑 적시는….”(44쪽) 중세 악마주의적 음산함이 느껴지는 이 장면은 ‘그녀(엄마)’가 ‘나’를 낳던 모습을 상상하는 대목이다.

이들 모자는 편혜영씨의 첫 창작접 ‘아오이가든’의 주민들이며, 특별할 것 없는 ‘인간’이다. 모든 생명은 신성(神聖)하며, 출산은 신성(神性) 부활의 제의라는 통상의 ‘착한’ 관념은 이로 하여 격렬한 도전에 직면한다.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가 이성과 윤리의 껍질을 벗고 선 동물적 본성의 공간이었다면, ‘아오이가든’은 관념이 아닌 존재 자체로서의 짐승적 공간이다.

부패한 동물들의 사체가 쓰레기더미와 함께 거리를 뒤덮은, 수년째 원인 불명의 전염병이 안개처럼 점령하고 있는 도시. ‘아오이가든’은 그 도시의 역병이 처음 발생한 아파트 단지다.

피와 고름, 단백질 연소 냄새들로 머리가 지끈거리는 이 공간에서 ‘그녀’는 고양이의 배를 갈라 자궁을 들어내고, ‘나’는 그 고양이 털을 깎아 삼키고, 임신한 누이는 수십 마리의 붉은 개구리를 낳는다. ‘왜?’라는 질문은 무의미하다.

첫 단편 ‘저수지’는 실종사건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도시 외곽의 한 저수지와 그 물가 방갈로에 숨어 사는 어린 세 형제의 이야기다. 한 때 맑았던 저수지는 썩은 물과 악취로 뒤덮였다.

미궁에 빠진 사건으로 다급해진 경찰은 저수지의 물을 양수기로 퍼내지만 그 바닥은 드러나지 않는다. “(시체들은) 아무리 물을 퍼내도 찾을 수 없는 곳, 지구의 핵을 지나 맨틀 가까이 다가간다고 해도 찾을 수 없는 곳에 유기되어 있을 터였다.”(34쪽) 형제들은 저수지 속에 인간을 잡아먹는 괴물이 산다고 믿는다.

“엄마 뱃속에서 자기를 끌고 나온 것은 저수지에 사는 괴물이었다. … 기다란 혓바닥을 내밀어 엄마 뱃속을 핥았다. 피가 묻은 둘째의 몸뚱이를 핥아준 것도 괴물이었다.”(24쪽) 이 ‘괴물의 자식’들은 돈 벌러 도시로 떠난 엄마가 바깥으로 자물쇠를 채운 이래 그 공간에 갇혀 굶주리고 병들고 부패해 죽어간다.

책에 든 9편의 단편들은 하나같이 시체와 피와 고름과 그것들이 발산하는 역한 냄새들로 출렁인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야 관점에 따라 여러 층위에서 전달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이 책을 읽는 동안 지금껏 의심 없이 선험적으로 받아들였고, 이미 잠재의식 속에 각인된 거대한 무엇(이를테면 착한 관념)이 균열하기 시작한다는 점일 것이다. 하지만 모든 균열하는 것들, 균열케 하는 것들을 아름답다고 말하려면, 균열의 고통이 조금은 가라앉아야 할 듯 싶다.

최윤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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