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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법치주의 또는 觀淫症

입력
2005.08.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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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출근하면서 아내에게 물어 보았다. 교육이나 집값 문제 등을 빼고는 세상 돌아가는 일에 도통 관심이 없어 지금도 “X파일이 뭐야” 하고 묻는 사람이다. “불법 도청 녹음테이프가 있고, 그 안에 혹시 국민적 관심을 끌 내용이 담겨 있는지도 모르는데 공개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법은 공개하지 못하게 돼 있어.”

대답은 간단했다. “법이 하지 말라면 하지 말아야지.” “정치인이나 기업의 비리가 들어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렇다고 공개하면 불법 도청 유혹이 커지고, 사회가 더 혼탁해지지.” “그래도 내용을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남의 일이니까 그렇지, 자기가 조금이라도 관계가 있다면 그렇겠어? 누가 엿보거나 엿듣는다는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데.”

때로는 간단한 상식이 복잡한 논쟁보다 낫다. 길게 이어지고 있는 불법 도청 공개 논쟁에서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잊고 있는 것도 다름아닌 상식이다.

●민주화의 성과 허물 것인가

헌법이 ‘모든 국민은 통신의 비밀을 침해받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법률이 대화를 포함한 통신의 비밀 보호를 위한 장치를 두고, 특별히 예외적인 경우의 ‘감청’에도 엄격한 요건을 정한 마당에 이런 논쟁 자체가 상식과 멀다.

그럴 만한 사정은 있다. 현재 문제가 된 ‘X파일’은 도청이 얼마나 심각하게 인권을 침해하고, 인격을 파괴하고, 정치ㆍ사회의 건전성을 해치는지를 누구보다 절실하게 깨달았을 ‘문민정권’이 자행한 도청의 결과다.

스스로 통신비밀보호법까지 만들어 놓고, 뒤로는 도청을 했으니 국민적 분노와 배신감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것이 정치 권력 자체에 대한 불신과 분노로 이어진 것도 자연스럽다.

그러나 정치 권력에 대한 분노, 그에 협조했을지도 모르는 세력에 대한 비난 가능성 때문에 도청 자료를 보겠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도청 당하지 않을 권리’의 보장을 위해 우리 사회가 치렀던 희생을 잊는 일이고, 어렵게 이룬 역사의 성과를 허무는 일이다. 나아가 민주주의의 근간인 법치주의의 원리를 위협한다. 여론의 이름으로도 정당화되지 않는 헌법 파괴적 행위다.

지금은 그럴 만한 혁명적 상황도 아니고, 그에 준하는 근본적 법의식의 변화도 읽을 수 없다. 그저 보고 싶다, 듣고 싶다는 욕구만 팽배할 뿐이다.

우리 사회의 법의식이 아직 이 정도인가 싶다. 헌법 수호의 책무를 진 대통령이 헌법 정신에 어긋나는 ‘진실’을 언급하고, 대학에서 법을 전공한 여당 대표가 위헌적 특별법 제정을 주장하는 판이니 굳이 여론을 탓할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민정부’의 불법 도청에서 드러났듯 정치 권력은 늘 정치적 이해를 따라 움직인다. 그러니 정치권의 움직임은 오히려 논외로 칠 수 있다.

온갖 주장이 난무하지만 역시 가장 큰 문제는 국민의 호기심이다. 공개 여부를 단언하지 못하는 검찰이나, 열심히 주판알을 튕기고 있는 정치권이 모두 여론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인간의 원초적 호기심은 신도 막지 못했다. 그것이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고려되는 호기심은 전혀 성격이 다르다. 지금은 남의 일인 것 같지만 언젠가 자신의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자각으로 자제할 수 있고, 도를 넘어 남을 해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면 제약해서 마땅하다.

●엿보기ㆍ엿듣기 유혹 버려야

도청 테이프 공개를 외치는 여론에서는 집단적 욕구로 웃자란 관음증이 읽힌다. 아니, 이미 그 이상이다. 남의 정사를 엿보려는 은밀한 욕망을 넘는, 아예 비데오 테이프를 상영하라는 요구다. 알 만한 사람의 불륜 현장을 똑똑히 확인해서 사회정의를 바로잡으려고?

애초에 길을 잘못 접어든 논란이지만 이쯤에서 결단을 내릴 때다. 무엇을 버릴 것인가. 법치주의의 이상인가, 아니면 관음증인가. 끝내 관음증을 버리기 싫다면 그대들의 안방에 몰래 카메라가 달려도 좋다는 각오부터 하시라.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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