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6일 월요일 아침. 시민들이 출근 준비로 분주한 가운데 맑은 히로시마 하늘위로 비행기 세 대가 나타났다. 이날 이른 새벽, 당시 세계 최대의 공군기지가 있던 서태평양의 작고 외딴 섬 티니언을 발진, 4,800㎞를 비행해온 미군 전폭기 B-29였다. 이 중 조종사 폴 티비츠가 자신의 어머니 이름을 따 ‘에놀라 게이’로 이름 붙인 전폭기에는 길이 3m, 지름 71㎝, 무게 4,360㎏의 폭탄 ‘꼬맹이’(Little Boy)가 실려 있었다.
태평양 전쟁 말기 일본 본토를 거의 초토화시킬 정도의 미군 공습에도 이를 비껴나간 인구 30만 명의 히로시마 시민들은 그저 무심히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 무심한 눈길 위로 티비츠는 T자 모양의 아이오이바시(相生橋) 다리를 정조준해 ‘꼬맹이’를 탑재한 해치를 열었다.
정각 8시15분. 태양 빛조차 집어삼킬 정도의 강렬한 섬광과 함께 TNT 1만3,000여 톤에 맞먹는 무시무시한 폭발은 거대한 버섯구름을 만들어 냈다. 폭발풍은 주변 수십 ㎞ 이내 모든 흔적을 지웠고, 이어 죽음의 ‘검은 비’(방사능 낙진)가 쏟아져 내리면서 남은 생명을 지웠다. 그렇게 8만여 명이 순간에 스러져 갔다. 7월16일 미국 뉴멕시코주 호르나다 사막에서 원자폭탄 실험이 성공한 지 딱 3주 만이었다. .
마침 6일은 원자폭탄 투하 60주년이 되는 날이다. 역사를 뒤바꾼 일대 사건의 기념일을 맞아 당시의 상황을 세밀히 그려낸 ‘카운트다운 히로시마’(원제 Shockwave: Countdown To Hiroshima)가 나왔다. 저자 스티븐 워커는 옥스퍼드대학과 하버드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작가이며 영국 BBC에서 12년간 일한 다큐멘터리 전문 프로듀서로 2003년 다큐멘터리 ‘히로시마: 세계를 뒤흔든 하루’를 감독해 에미상을 수상했다.
책은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하고 실제로 투하되기까지 짧지만 결코 인류역사에서 잊힐 수 없는 3주를 426쪽의 두툼한 분량에 꼼꼼히 복원해낸다. 저자는 원자폭탄 투하 당사자 중 생존해 있는 이들을 직접 인터뷰하고, 원자폭탄의 산실 로스앨러모스를 비롯하여 히로시마, 티니언 등지를 돌아다니며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원자폭탄 투하 과정을 눈 앞에서 보듯 생생하게 펼쳐낸다.
포츠담선언문 채택을 앞두고 처칠에게만 작전계획을 귀띔한 트루먼, 출격 전날에서야 자신들이 투하할 폭탄의 어마어마한 정체를 알게 되는 조종사들, 폭탄의 과도한 무게로 인해 폭격기가 티니언의 활주로를 뜨지 못하고 그대로 폭발할 수도 있었던 아찔한 상황, 폭탄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규모의 도시로 히로시마가 선정된 것 등 원자폭탄 투하를 둘러싼 상황들을 워커는 유려한 문장으로 숨가쁘게 전개해간다.
책에는 호르나다 사막 한 가운데 철제 탑에서 하루 밤 동안 최초의 원자폭탄을 지키며 실험을 준비했던 과학자 돈 호니그, 육군소령 레슬리 그로브스와 물리학자 존 오펜하이머 등 원자폭탄 제작에 직접 참여했던 사람들이 등장하고, 당시 ‘빅 스리’(Big Three)라 불리며 세계 정세를 쥐락펴락 했던 트루먼 처칠 스탈린과 일본 정치인, 관료도 모습을 드러낸다.
뿐만 아니라 히로시마에 살며 원자폭탄의 피해를 입은 생존자들과 폭격에 참여했던 미군의 생생한 목소리와 행동도 함께 담겨있다. 단순히 원자폭탄의 제작과정을 다룬 과학서나 피폭자의 참상을 다룬 전쟁 비판 도서와 달리 다양한 시각에 입각해 역사의 한 장면을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인도한다.
저자는 적게는 4만 명, 많게는 50만 명의 미군 희생자를 불러올 것으로 예상되던 일본 본토 진입 작전 대신, ‘꼬맹이’가 희생을 줄이고 종전을 앞당긴 확실한 대안이었는지에 대한 평가는 유보한다. 대신 미국이 실험에 성공한 지 3주만에 전격적으로 원자폭탄을 투하한 이유는 소련의 남진을 저지하고 전후 주도권을 잡기 위한 전략적 구상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인류는 원자폭탄으로 ‘평화 아닌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는 조지 오웰의 말을 상기하지 않아도, 북핵 위기로 지난한 협상과정을 밟고 있는 우리에게 남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책이다. 황금가지 출판사가 7월 미국 영국 일본 독일 출간을 앞두고 3월초 저자로부터 따로 원고를 받아 번역해 국내 독자들이 큰 시차를 두지 않고 읽을 수 있도록 했다.
라제기기자wenders@hk.c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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