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정의 초록이 물에 잠겼다.
연못의 수면은 도화지가 되어 여름의 빛을 고스란히 풀어내고 있다. 깊고 짙은 저 색을 저울질할 수 있다면 무게가 만만치 않으리라. 경북 청송의 주왕산 자락에 숨은 주산지는 신비한 빛의 연못이다.
동트는 시각에 맞춰 졸린 눈 비비며 서둘렀다. 청송의 깊은 골들이 품은 안개를 헤쳐가며 새벽 주산지를 찾는 이유는 순결한 연못의 ‘정(靜)’을 느끼기 위해서다.
호젓한 비포장길을 걸어 들어 가 만난 주산지의 수면은 거울이 무색할 지경이다. 그러다 잠깐, 아침을 부르는 새소리에 잠시 파르르 요동칠 뿐이다.
주산지는 인공의 연못이다. 조선 숙종때(1720년) 둑을 쌓기 시작해 1년 만에 완성했다는 이 연못은 계곡 아래 논과 밭에 물을 대기 위해 만든 저수지였다.
그 300년의 시간을 물빛에 고스란히 담고 있는 저수지는 길이 100m, 폭 50m의 학교 운동장만한 크기다. 규모는 대단치 않지만 단 한 번도 물 마른 적 없었다.
주산지를 감상할 때는 머리를 들 수 없다. 마치 렌즈에 포착된 화상처럼 물 표면이 찍어낸 풍경, 그 연못의 참모습에서 눈을 뗄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주산지를 이렇듯 깊게 가라앉힌 것은 물속에 뿌리를 박고 선 30여 그루의 왕버드나무다. 가지 축축 늘어진 여느 버드나무와 달리 하늘을 향해 꼿꼿이 가지를 뻗치고 있다.
100년이 넘는 고목들로 신산의 세월이 연녹의 이끼옷을 입고 있는 울퉁불퉁한 줄기에 스며 들었다. 초록물에 잠긴 왕버들은 그렇게 하늘로 뻗고 물위로 또 뻗어 있다. 하기사 애초부터 누가 물속에 나무를 심었겠는가. 30여년 전 저수지의 수위를 높이면서 수몰된 나무들이다.
모내기로 비워졌던 저수지는 장마 덕에 물이 많이 불었다. 하지만 성에 차지 않는 비의 양에 아직 만수가 아니다. 왕버드나무의 뿌리가 물 위로 드러난 이유다.
줄기와 가지가 영험하다면 뿌리는 기괴하다. 가는 실타래 같은 것이 얼키고 설켜 빚어낸 그 모습은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왕버드나무가 물 속에 묻어 감추고 싶은 생(生)의 고단함일까.
청송=글ㆍ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 호젓한 명승지 '주왕산·주변 계곡'
주산지를 품은 경북 청송 땅은 깊고 궁벽하다. 봉화, 영양과 함께 경북의 3대 오지로 손꼽는 천혜의 자연을 지니고 있는 곳이다. 돌산의 아름다움이 이보다 더 할 수 없다는 주왕산에서부터 깊은 골마다 숨어있는 맑디 맑은 계곡들은 더위를 피하고 일상을 잊기에 그만이다.
전설로 굳어지고 전설보다 아름다운 주왕산
중국 당나라 덕종 15년(799년)에 주도라는 사람이 주왕을 자칭하며 난을 일으켰다. 하지만 주왕은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군사에 쫓겨 한반도의 구석진 곳 석병산까지 들어왔다. 암굴에서 목숨을 부지하다 결국 토벌군에 목숨을 잃고 만다.
돌이 병풍을 둘렀다는 석병산(石屛山)이 주왕산(周王山ㆍ720㎙)이 된 연유다. 바위와 암자, 굴마다 주왕의 전설이 깃들어 있다.
국립공원 주왕산의 상의 매표소를 통과하면 바로 대전사(大典寺)다. 주왕의 아들 대전도군에서 이름을 딴 절이다. 아담한 사찰이 눈을 놀라게 하는 것은 절을 안고 있는 깃대봉의 풍경 때문. 뫼 산(山)자를 빼닮은 영봉이 우뚝 솟아있다.
대전사 경내를 지나면 주왕산의 절경이 염주 꿰듯 이어지는 길이 맑은 주방천을 따라 이어진다. 산행이라기 보다는 산책에 적합한 길이다. 길 옆에 커다란 바위 하나. 가랑이 밑으로 해서 던진 돌이 바위에 올라 떨어지지 않으면 아들을 낳는 다는 아들바위다. 소망어린 잔돌들이 가득하다.
급수대 등의 암벽에 감탄하며 30여분 오르면 제1폭포와 주왕굴로 갈라지는 갈림길이 나온다. 주왕이 마지막에 은거했다는 주왕굴 입구에는 가느다란 물줄기가 흘러내린다. 굴 속에 있던 주왕이 이 물을 마시려 고개를 내밀었다가 토벌군의 화살에 맞고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주왕굴에서 제1폭포까지 이어지는 오솔길은 금강송이 도열한 최고의 산림욕 코스다. 제1폭포로 들어가는 길은 비밀의 문처럼 수직의 바위가 협곡을 이루고 있다.
폭포의 높이는 대단치 않지만 낙수 소리가 메아리 치는 울림통 역할의 바위 벽이 장관이다. 이 길을 따라 계속 가면 제2폭포와 제3폭포를 만나고, 좀 더 오르면 전기 없는 오지 내원동 마을을 만난다.
청정 옥류의 청송 계곡들
청송의 암벽미는 주왕산 만으로는 부족한가 보다. 기암의 아름다움은 골과 골이 품은 계곡으로 흘러 들어 곳곳에 절경을 수놓는다.
주왕산 남동쪽의 절골. 주산지와 가깝다. 주왕산의 주 계곡인 주방천에 비해 규모는 크게 처지지만 풍광은 뒤지지 않는다는 평가다. 약 8㎞에 달하는 계곡에는 차디 찬 맑은 물이 사시사철 흘러내린다. 쭉쭉 솟은 기암괴석과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내주왕산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품은 조용한 계곡이다.
절골과 주산지에서 나와 914번 지방도를 타고 동쪽으로 달려보자. 우설령 등 험한 고개를 넘어가면 영덕군 달산면이다. 길가에 영덕군에서 심은 백일홍이 50리를 이어져 붉게 타올랐다.
장관이다. 달산에서 꺾어지는 백일홍 가로수 길은 다시 69번 지방도와 932번 지방도를 타고 청송으로 되돌아 오는데 그곳에 계곡 피서지로 이름난 옥계계곡이 있다.
주왕산 남쪽 자락과 동대산, 내연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합쳐져 흐르는 수려한 바위 골짜기다. 기암괴석 사이를 돌아 옥같이 맑은 물이 흐른다고 해서 옥계다.
옥계계곡과 가까운 청송군 부동면 향리의 잣밭골. 한여름에 돌에 얼음이 낀다고 해서 얼음골로 알려진 곳이다. 기암괴석의 절벽에는 62㎙ 높이로 인공 물길을 만들었다. 여름에는 폭포로, 겨울에는 빙벽으로 아름다움을 준다. 겨울철 전문 산악인들의 빙벽 훈련장으로 각광받는 곳이다.
주왕산 자락은 아니지만 안덕면 길안천 자락에도 절경의 계곡이 숨어있다. 신성교에서 시작해 방호정 정자를 지나 구불구불 이어지는 신성계곡은 절벽의 아름다움과 함께 넓은 모래톱이 있어 가족 나들이에 제격이다. 그 물길이 이어져 만나는 백석탄은 기기묘묘하게 깎인 바위들이 물길 바닥에서 솟아올라 감탄을 자아낸다.
수천, 수만의 시간 물과 바람이 빚은 조각 작품이다. 신성교에서 백석탄 까지는 물길이 9㎞ 가량 이어지는데 좌로 우로 산수화에서나 볼 법한 기암 절벽이 끊임없이 이어져 눈을 즐겁게 한다.
최근 부남에서 길안을 잇는 도로(930번 지방도)가 포장돼 계곡을 찾아가기가 훨씬 쉬워졌다.
청송=글ㆍ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 주산지 가는 길
깊숙이 들어앉은 청송. 그래서 길이 멀다.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서안동IC에서 빠져 나온다. 34번 도로를 타고 안동시내를 거쳐 계속 달리면 청송군 진보. 이곳에서 31번 국도를 갈아타고 남으로 향한다.
914번 지방도를 타고 주왕산 국립공원 쪽으로 가다 공원 단지를 지나쳐 10여분 달리면 부동이고 주산지와 절골을 가리키는 이정표를 만날 수 있다. 주산지는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청송군 문화관광과 (054)870_6236, 국립공원 주왕산 사무소 (054)873_0014
여행박사 국내여행팀은 매주 금, 토요일 저녁에 출발, 무박 2일로 주산지 새벽안개, 주왕산, 영주 부석사를 둘러보는 상품을 내놓았다. 6만5,000원. (02)730_0869
■ 길에서 띄우는 편지/ 주왕산
주산지를 거쳐 주왕산을 찾았을 때 우연히 ‘사슴 할아버지’로 불리는 권영도(70)씨를 만났습니다. 전기 없는 오지 내원동 마을의 터줏대감이자 주왕산의 골과 골을 꿰뚫고 있는 산꾼입니다.
사슴 할아버지는 지금 내원동이 아닌 산밑에서 살고 있습니다. 국립공원 관리공단에서 마을이 자연을 훼손한다며 모두 나가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주민들이 등산객을 상대로 무허가로 음식을 팔았던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사슴 할아버지는 내원동 지키기란 힘겨운 싸움과 함께 주산지에 있던 영화 세트 ‘물위의 사찰’을 되찾아 오는 운동을 주민들과 펼치고 있다고 했습니다.
사실 주산지가 유명해진 것은 2003년 개봉한 김기덕 감독의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덕분입니다. 영상에 담아낸 주산지의 깊은 풍경만으로도 진한 감동을 선사했던 명작이었습니다.
하지만 몇 억을 들여 만든 사찰 세트는 영화 촬영이 끝나고 얼마 안 가 주산지에서 쫓겨났습니다. 세트가 저수지 둑의 물길을 막는데다, 간혹 일부 관광객이 세트까지 헤엄쳐 가서 비롯된 안전 문제 등이 그 이유였습니다.
사슴 할아버지는 “그건 다 관리와 의지의 문제일 뿐”이라고 통박했습니다. 물위의 사찰이 있을 때 주산지는 순서를 지켜가며 카메라를 들이댈 정도로 많은 이들이 몰렸다고 합니다.
영화 세트가 비록 허상이라 할지라도 주산지는 그 세트로 인해 새로운 주산지로 태어났다는 실체적 진실이 아닐까요?
그럼 지금 그 물위의 사찰은 어디에 있을까요? 산 넘고 물 건너 강원 평창땅으로 가서 용평스키장 호숫가에 ‘사계사(四界寺)’란 이름으로 서 있습니다. 잇속 밝은 리조트가 청송군이 걷어찬 복덩어리를 거둬들인 것이죠.
인천시가 영화 ‘실미도’ 촬영이 끝나고 실미도에 설치된 세트를 치우지 않는다고 제작사를 고발까지 해가며 모두 철거해 간 적이 있습니다.
그 일로 담당 공무원은 좌천됐고 시는 뒤늦게 유격 체험장을 만든다, 영상종합단지를 세우겠다는 둥 뒷북만 쳐댔습니다. 씁쓸한 해프닝이었습니다.
궁벽(窮僻)한 땅 청송에서 느낀 ‘궁박(窮迫)’한 관광 마인드. 아쉬웠습니다.
이성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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