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상의 온갖 진기하고 잔인한 일들을 모은 구알티에로 야코페티의 몬도가네(Mondo cane)라는 영화에 비키니 섬의 거북이가 방향을 잃고 헤매는 이야기가 나온다.
비키니 섬은 1946년 미국이 핵 폭탄을 실험한 곳으로, 영화는 실험 후 알에서 깨어난 거북이들이 방향감각을 상실해 바다로 가지 못하고 모래 언덕을 헤매다 죽음을 맞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서태평양의 마샬제도 북부의 아름다운 산호섬 비키니의 이름을 세계에 퍼뜨린 것은 파격적인 수영복이 큰 몫을 했다.
■ 비키니 섬의 핵 실험이 세계에 충격을 준 직후 프랑스의 한 디자이너가 초소형 수영복을 개발해 시판하면서 선전을 위해 상표 이름을 공중에 쓰는 곡예비행을 했다. 그러자 라이벌 디자이너인 자동차기술자 출신의 루이 레아드가 남자손수건 절반 크기의 천으로 가슴과 아랫도리를 가린 수영복을 선보였다.
피아노의 다리에도 양말을 신길 정도의 보수적 분위기였던 프랑스에서 레아드의 수영복은 사람들의 넋을 잃게 했다. 이 충격이 비키니 섬의 핵실험과 비슷하다 해서 수영복에 비키니란 이름을 붙였다.
■ 당시 사회가 얼마나 보수적이었던지 비키니를 입으려는 모델이 없었다고 한다. 하는 수 없이 카바레 스트립댄서에게 수영복을 입혔는데 이 스트립댄서는 덕분에 수만여통의 팬레터를 받는 유명인사가 되는 행운을 누렸다.
비키니가 유행을 하자 바티칸 교황청은 부도덕하다고 비난했고,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은 법으로 이 수영복의 착용을 금지시켰다. 소련은 퇴폐적 자본주의의 또 다른 샘플이라며 매도했다. 엄청난 돌풍을 일으켰지만 몇몇 영화배우가 입어 화제가 되었을 뿐 상업적으로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 그러나 60년대 접어들면서 분위기가 바뀌어 세계적으로 비키니 수영복의 대중화바람이 거세게 몰아쳤다. 우리나라에서도 이 수영복이 여성 해방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면서 61년 국산 비키니 제품이 등장했다.
무더위 내습과 함께 패션업계가 비키니 수영복의 대유행을 예고하면서 올 여름 해수욕장 풍경이 어느 정도 상상되었지만 실제로 아찔할 정도의 수영복이 등장했다고 한다. 이미 시내 거리에서 웬만한 노출을 목격하는 터라 그리 놀랄 일만도 아닐 것이다. 특히 다운타운 클럽에서 가끔 벌어진다는 노출공연이 지상파 방송에서 생중계되는 상황에 비하면.
방민준 논설위원실장 mjb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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