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아하게 정좌한 스님이 유리잔 맑은 물에 한 방울씩 잉크를 떨어뜨렸다. 그리고는 탁해진 잔에 다시 맑은 물을 부었다.
“인간이 태어났을 때의 마음은 무색무취한 맑은 물과 같지만 세상을 살아가면서 다른 이들로 인해 맑은 물에 잉크가 번지듯 오염됩니다.
이미 탁해진 물에서 잉크와 맑은 물을 다시 분리하기 어렵듯 오염된 마음에서 잘못을 저지른 부분만 가려 내는 것은 어렵습니다. 가장 좋은 마음의 정화방법은 칭찬과 감사, 용서의 맑은 물을 부어주는 겁니다.”
지난달 말 조계종 용타 스님의 명상 프로그램 ‘동사섭(同事攝)’이 진행되던 충남 논산의 원불교 수련원. 촛불 만이 어둠을 밝힌 실내에서 숨소리도 내지않던 참가자 70여명은 곧 자신들이 마음을 오염시켰을 이들에게 용서를 구했다.
누구는 “가정을 지키지 못하고 이혼하는 바람에 부모님께 너무 깊은 상처를 드린 것 같다”며 고개를 떨궜고, 또 다른 누구는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방패막이가 돼주지 못한다고 어머니를 화풀이 대상으로만 생각했다”며 눈물을 흘렸다.
‘동사섭’은 ‘중생과 희로애락을 함께 느끼며 배운다’는 의미. 용타 스님이 불교적 가르침과 심리학 이론을 명상의 방법론에 녹여 5박6일 동안 서로가 마음을 열고 일상에 지친 심신을 추스리도록 꾸민 교육과정이기도 하다. 명상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고 부정적인 자아를 긍정적으로 바꿈으로써 자신과 남을 두루 행복하게 하자는 취지다.
일견 ‘템플 스테이’와 유사해 보이지만 종교적 색깔을 최대한 배제했다는 점이 다르다. 그래서 프로그램에 참여한 의사 대학교수 회사원 주부 대학생들 가운데는 기독교 신자들도 적지 않다.
동사섭은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다룬 강의를 모두(冒頭)로 해서 먼저 이틀에 걸쳐 행복에 대한 이론을 배운다.
곧 이어 명상을 통해 행복을 직접 찾고 체득하는 경험을 한다. 명상은 행동명상(3일째)-주전자 명상과 절명상(4일째)-독배명상과 맑은 물 붓기 명상(5일째) 등 다양한 방식으로 구성돼 있어, 눈 감고 치열하게 화두를 붙들고 싸우는 일반적인 명상과는 사뭇 다르다.
행동명상은 마음 가는대로 허식을 훨훨 벗어버린 자유로운 행동만으로도 정신의 병을 고칠 수 있다는 행동주의 심리학 방법을 차용한 것. 스님은 “수줍음도 마음의 사슬”이라며 미소-함박웃음-노점상-배 아픈 개-투견-슬픔과 분노 등의 주제를 차례차례 행동으로 표현하도록 유도했다.
처음에 영 어색해 하던 ‘점잖은’ 참가자들은 곧 스스로 싸움 개가 돼 그악스럽기 그지없는 행태를 보이다가 대성통곡을 하기도 하는 등 주변의 시선을 전혀 개의 않고 감정을 그대로 폭발 시켰다.
“숫기가 너무 적어 사람들 앞에선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하는 성격”이라고 밝힌 한 대학원생(26)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감정을 표현하고 나니 마음이 후련해지고 자신감이 생겼다”며 눈믈조차 채 닦지 못한 얼굴로 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주전자 명상은 참석자들이 큰 원 모양으로 둘러앉아 중앙에 주전자를 올려놓고 감사의 말을 써내려 가는 방식이다. ‘뚜껑으로 라면을 먹을 수 있게 해준다’ ’난로에서 끓는 주전자는 정겨운 소리를 낸다’ ‘스스로를 비움으로써 채울 수 있는 깨달음을 얻게 해 준다’는 등 갖가지 발상들이 튀어나왔다.
서로가 서로에게 삼배를 올리며 존귀함을 표현하는 절 명상을 통해서는 오랫동안 잃어버리고 있던 사랑과 이해의 마음을 되찾은 부부가 서로 눈물을 떨구는 모습도 보였다.
남편의 삼배를 받은 아내(32)는 “보잘 것 없는 내게 남편이 마음을 다해 절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정말 소중한 존재’임을 인식하는 순간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고 했다. 한 이혼남(42)은 “이걸 모르고 아내와 헤어진 게 너무 아쉽다”고 회한을 토로했다.
‘집착을 버리고 당장이라도 독배를 마실 수 있느냐’는 화두로 진행된 독배명상에서는 여럿이 “회사를 위해 일생을 바쳤지만 정작 독배를 마실 수 없도록 마음을 다잡아 준 것은 소중한 가족이었음을 깨달았다”고 소감을 털어 놓았다.
“세상은 바라보기에 따라서 지옥이 될 수도, 극락이 될 수도 있음을 알려주고 싶은 겁니다.” 용타 스님이 명상 프로그램을 통해 가르친 것은 지극히 단순한 진리, ‘일체유심조(一切有心造)’였다.
논산=안형영기자 prometheu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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