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함양은 복받은 고장이다. 당대에 이름을 떨친 문장가를 둘씩이나 고을 수장으로 모셨으니 말이다. 그들이 주민 편의를 위해 남긴 치적이 지금은 훌륭한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으니 금상첨화인 셈이다.
첫번째 주인공은 실학자이자 소설가인 연암 박지원(1735~1805)이다. 청나라의 문물을 익힌 그는 함양 땅에 국내 최초로 물레방아를 만들어 보급했다. 디딜방아로만 곡식을 찧던 당시 주민들에겐 엄청난 문화충격이었을 터이다.
또 다른 주인공은 통일신라 명문장가 최치원(857~?)이다. 고을 부사로 부임한 그는 마을 앞을 흐르던 개천이 홍수 때마다 범람하는 것을 막기 위해 둑을 쌓고 인공 숲 상림(천연기념물 154호)을 만들었다.
1,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함양은 홍수의 피해가 거의 없으니 대단한 일을 했음에 틀림없다. 5㎞에 달하는 숲이 줄어 1.6㎞ 정도만 남아있지만 지금도 전국에서 가장 잘 가꿔진 숲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120여종 2만 그루의 활엽수와 낙엽수가 계절에 따라 신록, 녹음, 단풍, 눈꽃을 빚어낸다.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 아름다움을 지녔다.
전국에 수많은 여행지가 널려 있지만 접근성에 있어 상림을 따를 곳이 없다. 대충 조성된 주차장에 차를 대고 대충 나있는 소로로 한 발짝 들이는 순간 이미 상림 속이다. 상림의 여름은 진초록 덩어리이다. 새벽이슬 머금은 꽃 이파리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면 금세 초록 물빛이 들 것 같은 느낌이다.
상림은 동화(同化)의 세계이다. 이은리석불, 함화루, 사운정, 초선정 등 숲속에 자리한 소품들은 원래 상림과 상관없는 것들이지만 어색하지 않다.
심지어 척화비와 독립투사의 기념비마저 적재적소에 배치된 느낌이다. 이 곳을 방문하는 나그네마저 숲에 동화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모든 것을 수용하는 너그러운 숲이다.
초록 상림이 요즘 들어 화사한 색으로 갈아입었다. 상림 옆 2만여평의 부지에 함양군이 연꽃단지를 조성한 것이다. 열대수련원, 수생식물원, 백련지, 홍련지 등 구간을 나누고, 300여종의 연꽃을 심었다.
340㎙에 달하는 연꽃 모양 탐방로를 따라 만개한 연꽃이 뿜어내는 색채의 향연이 화려하다.
뜬금없는 연꽃밭이 천년 숲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을 까 걱정했는데, 오히려 조화롭기까지 하다.
백운산과 가야산에서 나무를 가져와 금호미 한 자루로 하루 만에 상림을 조성했다는 최치원선생의 신통력이 아직도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연꽃밭을 만든 동기가 관광객 유치보다 주민소득 증대였다는 점도 상림의 조성동기와 다르지 않다.
하긴 연꽃만큼 최치원선생의 이미지에 맞아 떨어지는 꽃이 또 어디 있을까. 연꽃은 진흙 속에서도 도도함을 잃지 않고 꼿꼿하게 자라나, 고귀한 자태를 지닌 꽃을 피운다. 권력암투에 휘말린 신라조정에 환멸을 느껴 벼슬을 과감히 뿌리치고 지리산으로 자취를 감춘 그의 심성과 너무도 닮았다.
상림의 연꽃밭은 지금 백련이 한창이다. 커다란 잎사귀 사이로 살포시 고개 내민 순백의 꽃은 불교에서 극락정토 혹은 부처의 상징으로 여겨지면서 더욱 귀한 대접을 받고 있다. 백련만이 아니다. 내주부터는 홍련과 황련이 가세, 9월까지 숨가쁘게 피었다 지기를 반복한다.
연꽃이 지고 나도 서러워할 필요는 없다. 이때부터는 입이 즐거워진다. 연근은 토혈을 멎게 하고, 어혈을 없애며, 연밥을 죽으로 쑤어먹으면 보양식으로 더할 나위 없다.
연꽃은 마음을 진정시키며, 연잎은 갈증을 없애고 배앓이를 멈추게 하는 건강보조음식이다. 상림의 여름이 더욱 행복해진다. 함양군 문화관광과 (055)960_5530
함양=글ㆍ사진 한창만기자 cmha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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