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2년 청과 조선이 국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운 백두산정계비 자리와 비석을 세웠던 받침돌을 남한 학자들이 처음으로 확인했다.
북한 고구려 유적 조사를 위해 7월 19~30일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온 고구려연구재단 김정배 이사장은 3일 “원래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던 자리로 알려진 백두산 정상에서 남동쪽 4㎞ 지점(해발 2,200m)에서 정계비 받침돌을 찾았다”고 밝혔다.
광복 이후 정계비 자리를 남한 학자들이 눈으로 확인한 것은 물론 사진까지 찍어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대석(臺石)은 폭 40㎝ 크기의 타원형 화강석이며, 옆에 북한이 정계비 자리를 확인해 두기 위해 1980년에 세운 하얀 표석이 있다.
이번 확인은 역사적인 사실을 단순히 고증했다는 의미를 넘어선다. 백두산정계비는 조선과 청의 국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청이 거의 일방으로 세운 비석이다. 그러나 간도 문제를 풀어가는 가장 중요한 역사 자료일 뿐 아니라, 향후 국경분쟁을 우려한 누군가가 1931년 9월 감쪽같이 없애야 했을 만큼 폭발력을 지닌 유물이다.
북한 학자들과 고구려 유적을 공동 조사하기 위해 방북한 김 이사장, 최광식 상임이사, 임기환 실장 등 고구려연구재단 학자들과 전호태(울산대) 강현숙(동국대) 여호규(한국외국어대) 교수 등 10명의 조사단이 올린 성과다. 이들은 백두산 답사 중 북한 안내원 등에게 물어 정상인 장군봉 등정로에 있는 주차장 인근에서 정계지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동안 백두산을 다녀온 남한 사람들이 적지 않지만 정계비 자리 근처에 군 경비 초소가 있어 일부러 보자고 해서 찾지 않으면 확인하기 어려운 위치였다. 중국과의 외교적 마찰을 우려해 그 존재를 공식으로 확인하지 않는 북한도 아무 글이 없는 작은 표석을 세웠다. 또 북한이 제작한 현행 중국어판 관광 지도에는 ‘백두산사적비’라는 표시를 했다고 한다.
고구려연구재단이 정계비 지점에서 동과 서를 보며 찍은 사진을 보면 ‘서로는 압록강, 동으로는 토문강’(西爲鴨綠 東爲土門)으로 국경을 정했다는 정계비의 내용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서쪽으로는 압록강의 마른 줄기가, 서쪽으로는 쑹화(松花)강으로 합류하는 토문강의 줄기가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고구려연구재단 배성준 연구위원은 “고지도는 물론이고 현재의 지도에서도 정계비 자리에서 바로 이어지는 강은 쑹화강의 지류”라며 “중국은 토문강을 두만강이라고 주장하는 데 두만강 발원지인 홍토수, 석을수는 토문강이 휘감아 흐르는 대학봉 뒤쪽으로 훨씬 멀리 있어 정계비 지점에서는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고구려연구재단은 또 북한 사회과학원 등의 학자 5명과 함께 안악 3호분, 태성리 3호분, 진파리 무덤, 덕흥리 무덤, 강서 대묘ㆍ중묘ㆍ소묘, 수산리 고분 등을 실측하거나 내부 벽화 등을 근접 촬영한 것을 비롯해 평양성 축성자를 기록한 내성 남벽의 석각을 처음 확인했다.
또 일제 시기 작성한 도면을 근거로 강서소묘가 강서대묘와 구조와 같다고 잘못 알던 것도 실측을 통해 바로 잡았다. 강서소묘에는 연도에서 관을 비치한 널방에 이르는 계단과 관대가 없는 것을 확인했다. 김 이사장은 “이번 조사의 성과를 기반으로 해 향후 남북 공동 학술토론회를 추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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