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의 끝간데는 공공선(公共善)의 울타리 안에 있다고 믿는 이들이 있다. 일리 있는 견해다. 뛰어난 정치시들은 그 아름다움의 한 자락을 공적 선함의 열망에 걸치고 있다. 이와 반대로, 공공선을 일종의 인습으로 여겨 이를 거스르는 데에 아름다움이 있다고 믿는 이도 있다.
역시 일리가 있다. 급진적 탐미주의자들은 공공선을 악마적으로 위반함으로써, 추함 바로 이편의 아슬아슬한 아름다움을 만들어낸 바 있다. 위반도, 준수와 마찬가지로, 미리 기준을 설정한 뒤에야 실천할 수 있다면, 이 믿음들은 양 쪽 다 선함에 얽매여 있는 셈이다.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이하 ‘새는 하늘을’. 1988년)를 냈을 때의 서른 살 황인숙은 어느 쪽이었을까? ‘새는 하늘을’의 언어는, 자주, 급진적 탐미주의자의 것 이상으로 감각적이다. 시집에는 화자나 그 정서적 대체물이 오관을 활짝 열고 세계의 자극에 온몸으로 감응하는 장면들이 수두룩하다.
“온종일 비는 쟁여논 말씀을 풀고/ 나무들의 귀는 물이 오른다/ 나무들은 전신이 귀가 되어/ 채 발음되지 않은/ 자음의 잔뿌리도 놓치지 않는다/ 발가락 사이에서 졸졸거리며 작은 개울은/ 이파리 끝에서 떨어질 이응을 기다리고/ 각질들은 세례수로 부풀어/ 기쁘게 흘러넘친다”(‘봄’) 같은 시행을 보자.
화자의 감각이 투사된 나무들이 빗물(의 소리)을 빨아들이는(듣는) 정도는 “채 발음되지 않는 자음의 잔뿌리도 놓치지 않을 만큼”, “이파리 끝에서 떨어질 이응을 기다릴” 만큼 철저하고 남김 없다. (이파리 끝에 맺힌 빗방울의 둥근 꼴과 그것이 개울에 떨어지며 낼 소리의 낭랑함을 글자 ‘이응’에 견주는 재기란, 참.)
그러나 시집 전체를 통해서, 황인숙은 탐미주의자들의 (자기)파괴 욕망을 드러내는 법도 없고, 인습이든 아니든 공공선을 거스르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그가 공공선을 위해서 시를 쓰는 것도 아니다. 그에게 아름다움은 선함과 나란한 것도 아니고, 선함을 거스르는 것도 아니다. 선함과는 아무런 상호관계 없이, 급진적 탐미주의자들이 상정하는 음(陰)의 상호관계마저 없이, 아름다움은 그냥 거기 있다고 황인숙은 믿는 것 같다.
그런 그를 부드러운 탐미주의자로 부르기로 하자. 이 부드러운 탐미주의자는 화자들로 하여금 “오, 저 스며들어오는/ 이 세상것이 아닌 향기/ 이 세상것이 아닌 빛깔/ 이 세상것이 아닌 고요/ 오, 이 세상것이 아닌 마음”(‘황혼’)을 감지해 내게 할 만큼 섬세하지만, 시인-화자의 그런 예민한 감각은, 뜻밖에도, 성적 관능으로 치닫는 법이 거의 없다. 하긴 뜻밖이랄 것도 없겠다. 그는 급진적 탐미주의자가 아니라 ‘부드러운’ 탐미주의자니까.
황인숙의 언어들은, 독자의 정념을 이끌어내는 법 없이, 독자의 살갗을 간질인다. 의도된 것인지 타고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런 관능의 절제가 ‘새는 하늘을’의 감각적 언어에 넉넉한 기품을 부여한다. 이런 절제는 이 시집의 화자들이 연애와 무관해서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그들의 연애 상대가 구체적 개인이라기보다 시나 문학 같은 관념이어서 가능한 것인지 모른다.
“내 머릿속에 나무 하나가/ 그 뿌리를 억세게 뻗어/ 머리를 옥조이고/ 피를 흡빨고”로 시작해 강렬하고 섬뜩한 이미지들을 포개나가는 ‘내 머릿속에 나무 하나가’에는 연애에 막 들린 자의 신경질적 파토스가 넘실거리지만, 이 시 역시 여느 의미의 관능과는 무관하다. 화자를 “꿈속에서도 쉬지 못하”게 하는 나무가 문학이라는 관념이기 때문일 것이다. “오, 열려라, 바람이여/ 고통스럽겠지만/ 이대로 잠들지 말아다오, 언어여/ 실어(失語) 가에 나직이 자리잡은/ 존재여”라는 시행을 통해 사랑의 대상이 뮤즈임을 또렷이 하고 있는 ‘로망스’도 마찬가지다.
시인의 등단작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1984)는 시집 ‘새는 하늘을’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 가운데 하나다. 이 뛰어난 시의 인상이 워낙 강렬했던 탓에, 시집 ‘새는 하늘을’은 두 가지 오해를 사게 되었다. 첫째는 이 시집의 세계가 밝고 경쾌하고 발랄하다는 오해다. “윤기 잘잘 흐르는 (상상 속의) 까망 얼룩 고양이”의 발랄한 행태에 내세의 화자를 투사한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만이 아니라, 이 시집에 밝고 경쾌한 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소용없는 물건들을 시장에서 둘러보며 즐거워하는 화자가 나오는, 황인숙 시로서는 예외적으로 관능이랄 만한 것이 암시되는 ‘시장에서’ 같은 작품이 그렇다. 그러나 ‘새는 하늘을’의 공간은 근본적으로 불안의 세계다. 그 불안은 어른 되기의 불안함이다. 지난주에 살핀 이성복의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가 그랬듯, ‘새는 하늘을’도 일종의 성장시집인 것이다. 그러나 청년 이성복이 어른 되기의 어려움을 더러는 치기까지 동원해 돌파하려 한다면, 청년 황인숙은 그 어려움을 될 수 있으면 피하려 한다. 적어도 미루려 한다.
들머리에 놓인 ‘잠자는 숲’이나 ‘링반데룽’ 같은 시에서도, 화자는 “이대로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링반데룽’) 불안해, 차라리 “은사시나무숲으로”(‘잠자는 숲’), 어린 시절의 따스한 자족적 공간으로 되돌아가려 한다. 말하자면 ‘새는 하늘을’에는 퇴행의 욕망이 또렷하다.
발달심리학자의 눈에 시인의 이런 모습은 걱정스럽게 비칠지 모른다. 그러나 문학의 위대함은 의학적 ‘증후’마저 아름다움으로 바꿔놓는 데 있다. “내 가슴은 텅 비어 있고/ 혀는 말라 있”(‘잠자는 숲’)음을 털어놓던 서정적 자아가 “팔월의 어둠이 거미줄처럼 깔리고/ 등 댈 것이라곤/ 육교 기둥뿐/ 처참하도록 유유한/ 홀로 유유한 평화/ 파리 요람(거미줄에 걸린 파리에 자신을 투사하는 화자가 제 자리를 파리의 ‘무덤’이 아니라 ‘요람’이라고 우기는 것이 재미있다)의 평화”(‘링반데룽’)를 불안해할 때, 시인의 언어는 거의 치명적으로 아름답다.
부드러운 탐미주의자는 흔하다. 황인숙을 여느 부드러운 탐미주의자와 갈라놓는 것은, 급진적 탐미주의자가 선함을 희생시키고서야 빚어낼 법한, 치명적이리만큼 날카로운 아름다움을 그가 예사로 빚어낸다는 점이다. ‘새는 하늘을’ 속에서 황인숙의 언어는 주술을 닮았다. 그는 말 한마디로 세계를 지었다 부쉈다 하는 동화 속 마법사 같다.
두 번째 오해는 ‘고양이의 시인’이라는 황인숙의 명성이다.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를 비롯해 자신을 고양이에게 투사한 시들이 그에게 없는 것은 아니지만, ‘새는 하늘을’은 무엇보다도 새와 나무의 시집이다. 적어도 이 시집에서, 황인숙은 새와 나무의 시인이다.
“들벚나무와 사시나무/ 뿌리 사나운 아카시아와 싸리나무, 소나무/ 뜻밖에 만난 놀란, 한 그루의 향나무와/ 밟은 적도 긁힌 적도 무수한/ 덩굴나무와 가시나무/ 본 적은 있으나 이름 모를 나무들과/ 보지 못한 나무들/ 보지 못할 나무들”의 적의를, 다시 말해 살아있음을 거룩하게 환기시키는 ‘신성한 숲’이나, 하늘로 솟아오르는 새를 통해 자유의 홀가분함과 섬뜩함을 동시에 그린 표제시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에서, 새와 나무의 시인으로서 황인숙의 면모가 약여하다.
새와 나무 얘기가 나온 김에, ‘,’라는 괴상한 제목의 시를 보자. “바람이 내 투망을 걷어갔어/ 아니면 정신없이 걸린 새녀석들이/ 합심해서 삼켜버렸나?/ 휑하니 서 있는데/ 정말, 살금살금 움직이지 않고/ 서 있기도 오랜만인데/ 땅바닥이 왜 이리 평평하냐!/ 어지러워. 둥근, 가는 나뭇가지에/ 발가락을 걸고 매달리고 싶다.” 이 시집에서 드물지 않게 보이는 변신의 욕망이 여기서도 파닥거린다. 제목 ‘,’는 쉼표이기도 하고 새 발가락의 형상이기도 할 것이다. 평평한 데서 어지러움을 느끼는(!) 화자는, 문득 새가 돼 발가락을 나뭇가지에 걸고 쉬고 싶은 것이다. 쉼표의 형상과 의미를 동시에 부려 쓴 착상이 기발하다.
나무는, 위에서 인용한 ‘내 머릿속에 나무 하나가’에서도 그랬듯, 더러 시에 대한 화자의 순정을 대리한다. 화자에게 시적 상상력이란 “진정한 나무의/ 이마에서 뛰는 심장의/ 혈기방장한 이파리들!”(‘복 받을진저, 진정한 나무의’)인 것 같다. 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한 포즈는 오늘날 세련된 시인의 한 징표가 되었다. 그러나 ‘영혼’이라는 말 한 마디에 “나의 피톨들은 햇살을 가르고/ 수억 개의 팔랑개비처럼 돌아간다”(‘그가 ‘영혼’이라고 말했을 때’)고 털어놓는 시인-화자 앞에서, 자기가 죽으면 “가슴 위에 공책 한 권/ 그리고 오른손에 펜을 쥐어” 달라며 “비바람이 뚫고 햇살이 비워낸/ 두개골 속을/ 맑은 벼락이 울릴 때/ 그녀 오른팔 뼈다귀는/ 늑골 위를 더듬으리/ 행복하게 삐거덕거리며”라고 말하는 ‘비명(碑銘)’의 화자 앞에서 내 마음은 숙연하다. ‘새는 하늘을’은 문학적인, 너무나 문학적인 시집이다.
◆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보라, 하늘을.
아무에게도 엿보이지 않고
아무도 엿보지 않는다.
새는 코를 막고 솟아오른다.
얏호, 함성을 지르며
자유의 섬뜩한 덫을 끌며
팅! 팅! 팅!
시퍼런 용수철을 튕긴다.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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