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두율 교수, 고 윤이상씨 등과 함께 1974년 독일에서 ‘민주사회건설협의회’(민건)를 결성했다가 친북 인사로 분류돼 입국이 금지됐던 해외 기독교 통일운동의 대부 이영빈(79) 목사가 오는 12일 한국에 온다.
이 목사는 광복 60돌을 맞아 서울에서 열리는 민간차원의 남북 교류 행사인 ‘자주평화통일을 위한 8ㆍ15 민족대축전’에 참가하기 위해 고국 땅을 밟는다. 그의 방한은 1955년 10월 독일 교회의 초청으로 유학길에 오른 지 딱 반 세기만이다.
이 목사는 2일 한국일보와의 전화 통화에서 “다시는 살아서 돌아가지 못할 줄 알았던 조국 땅을 밟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뛴다”고 밝혔다.
1960~70년대 독일 한인교포사회 내의 반독재, 반유신 운동에 앞장서면서 79년 본 주재 한국대사관 점거농성에 참가했던 이 목사는 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계기로 ‘통일운동가’로 변신했다.
이 목사는 80년말 “유신이 무너졌어도 한국에 군부독재 정권이 다시 들어선 것은 민족 분단상황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린 뒤 해외 한인신학자들을 규합해 ‘조국통일해외기독자회’(기통)를 결성했다.
이듬해 6월 기통 대표자격으로 종교계 인사로는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 북한 조선기독교연맹과 조국평화통일위원회 관계자들과 만났다.
그의 방북은 같은 해 12월 오스트리아 빈에서 남북 기독교계 인사들이 분단 이후 처음 한 테이블에 앉은 제1차 유럽 통일대화로 이어졌다. 이것이 이후 고 문익환 목사의 방북에도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방북을 결행한 데는 실향민이라는 성장배경도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강원도 통천에서 목회를 하던 아버지 밑에서 자란 이 목사는 46년 신학대 진학을 위해 단신 월남했다. 다시 고향에 돌아가리라던 소망과 달리 통일은 오지 않았다. 부모 임종도 할 수 없었다.
이 목사는 “같은 분단국가이면서도 서신, 전화 연락은 물론 왕래도 자유로운 독일을 보면서 늘 안타까움이 컸다”며 “민간과 정부 등 다양한 채널을 통한 교류만이 통일을 앞당기는 길”이라고 말했다.
이 목사는 지난 91년과 94년 두 차례 평생 동지이자 반려인 부인 김순환(77)씨와 함께 입국을 시도했으나, 김포공항에서 당시 안기부에 의해 강제 출국 당했다.
지난 2003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로부터 초청을 받았을 때는 “국민의 권리인 입ㆍ출국조차 국정원이 제한하는 악법인 국가보안법이 살아있는 한 귀국하지 않겠다”고 거부했다.
이 목사는 이번에 마음을 바꾼 이유를 “북측에서도 163명의 대표단을 파견하는 등 남북이 한 자리에 모여 광복 60주년을 자축하는 잔치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이제야 통일의 물꼬가 트였구나’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전성철기자 foryou@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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