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출판 애지’라는 출판사가 최근 대전에서 문을 열었다. 동명(同名)의 시전문 계간지를 내던 ‘심지’라는 출판사가 시 전문 출판사를 별도로 차린 것이다. 그리고 얼마 전 ‘애지 시선’의 1호 시집으로 하종오 시인의 ‘님 시집’을 냈다. 출판자본과 문단의 영향력이 서울에 응집된 현실과, 이윤의 관점으로만 보자면 ‘애지’와 이들 시인들의 시도는 가히 거역(拒逆)적이라 해도 좋을 사건이다.
‘님 시집’은 하종오 시인의 12번째 시집이자, 님 시리즈 외편(‘님 시편’, 1994, 민음사)과 내편(‘님’, 1999, 문학동네)에 이은 3번째로 전편-본편-후편으로 이어질 전체의 전편에 해당한다고 한다. 서울과 강화를 오가며 밭 갈고 마음 갈며 시를 써 온 시인의 님 시리즈는 운문의 형식적 제약을 넘어 자유로운 정신의 운문으로 이어온 농촌서사의 장중한 흐름이다.
그 속에 놓인 이번 시집은 3부로 나뉘어 있다. 1부가 도시에서 농촌으로 들어와 살다가 도로 떠난 ‘님’을 두고 회상하고 되씹으며 그 의미에 골몰하는 ‘그이’의 시편들이라면, 2부는 ‘님’으로 하여 농사를 배우고 삶을 배워가는 ‘나’의 노래로 읽히고, 3부는 치이고 짓눌리며 신음하고 때로는 스스로 약아지면서 점점 피폐해가는 농촌의 실상을 담담히 이야기하고 있다. 시에는 농사와 땅의 섭리들이 체화되는 과정이 한 줄 정련된 경구처럼 박혀있고, 푸근한 웃음과 아릿한 신음이 배어있어 56편 한 편 한 편이 소설 같고, 이어 읽어도 소설 같다.
-…님을 볼 수 없는 날에는 들길에서 만난 들꽃에게 그이는, 꽃아 네 속으로 이 길 틀어 다오, 내 가서 줄기가 되마, 꽃아 내 속으로 저 길 옮겨놓을게, 네 와서 몸이 되어라, 말하기도 했습니다.…(제1부 제3편)
-…어딜 가나 호미 드신 님이 이래저래 떠올랐을 때에야 제가 머물러야 하는 집이 그리웠습니다. 저의 일생이란 결국 푸성귀나 다름없는 한해살이로 알고 돌아왔습니다.…(제2부 제2편)
-…님께서는 더 큰 땅을 가질 궁리만 하시고 저이는 곡식을 내다 팔아 술만 … 밤하늘에는 새의 길이 새로이 만들어지고, 날개를 가지고픈 무리들은 어두울수록 짖었습니다.…(제3부 제15편)
‘님’이며 ‘그이’ ‘저이’들이 모두 시인이 살던 강화 주민들이면서 우리네 모두의 모습일 수 있음은 ‘시인의 말’을 들춰보지 않더라도 알만한 일이다.
그는 ‘애지’의 시집 출간 제의를 받고 적잖이 난감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역에서 시집 출판이 활성화되고 판매도 괜찮게 되어 시집출판 자본이 축적된다면 지역의 좋은 시인들도 참가할 것이고, 그러면 그게 지역문학이 활성화되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최윤필 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