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미하엘 하네케 감독의 ‘피아니스트’를 보면서 이런저런 상념에 빠졌다가 엔드 크레딧이 오를 때, 갑자기 멍해졌던 기억이 있다. 충격이나 감동 같은 걸 얘기하려는 게 아니다. 그런 감동은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서 복잡다단해 보이는 인간사가 감추고 있는 몇 가지 일반적인 진실에 대한 무미한 동감으로 그쳐버릴 경우가 많다.
따라서 정말 무슨 말인가를 하고 싶어질 때는 뭔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혼돈이나, 졸지에 유구무언·무념무상으로 만들어버리는 모종의 공허감 같은 게 질기게 지속될 때이다. 그건 임계 직전의 물주전자처럼 결코 끓어 넘치지는 않는 고요한 내분이 안개의 형태로 피어 오르는 순간이다.
안개 속에서 말들은 비로소 맛깔스럽게 익는다. 감각의 최고 극점이 무감각에 가깝듯 그렇게 오래 익은 말들은 뜨겁지 않고 차갑다. 뜬금없이 2년 전 본 영화를 들춰내는 건 차가운 걸 갈급하는 요즘 심사 탓이다. 더울수록 적나라한 걸 찾게 되는 건 인간의 유구한 본능인가 보다.
안개라는 표현이 괜히 나온 건 아니다. 흔히 오리무중이니 암중모색이니 하는 상태를 시각화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자연이미지가 다름 아닌 안개다. 안개는 축축하고 시야를 불분명하게 하면서 속살부터 으스스 떨리게 한다는 점에서 비와는 다른 속성을 지녔다. 비가 직선의 궤적을 갖는다면 안개의 궤적은 보다 정적인 원에 가깝다.
그런 측면에서 터치 한번에 하나의 고정적인 소리만 울리게 돼있는 피아노를 비에, 몇 개의 음들이 수시로 변화하는 코드 안에서 물결치듯 번지는 현악기를 안개에 비유한다면 억지일까? ‘피아니스트’를 다 보고 나서 기묘하게도 알반 베르크나 안톤 베베른 풍의 현악 솔로가 오래도록 공명했던 느낌 때문에 해보는 소리다.
허튼 기교를 일체 용납하지 않는 마흔 살의 음악교수 에리카는 마치 피아노의 건반처럼 빛과 어둠이 극명하게 나뉜 삶을 산다. 학교에서는 우아한 기품의 실력 있는 선생이지만, 밤이 되면 그녀는 포르노샵에 들러 남성들이 자위하고 버린 휴지를 냄새 맡고 심야 자동차 극장에서 엉겨붙은 남녀들을 훔쳐보며 오르가슴을 느끼는 매우 독특한(?) 성적 취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그런 그녀에게 어느 날 잘 빠진 스타인웨이 피아노 같은 공대 청년 클레메가 접근한다. 이후, 여교사와 학생의 사랑이라는 뻔하면서도 늘 호기심이 당길 수밖에 없을 고전적 러브스토리가 이어지지만, 그 ‘러브’가 알고 보니 무척이나 괴이하고 모호한 ‘러브’라 마음이 실로 험상궂게 일그러지고 만다.
공대생답지 않게 쇼팽을 기가 막히게 연주하는 부르주아 청년 클레메는 괴팍하지만 매력적인 에리카와 낭만적인 사랑을 꿈꾼다. 과민한 이성으로 항상 신경이 곤두서 있는 에리카가 그걸 눈치채지 못할 리 없다. 에리카 역시 이 젊고 미숙하지만, 세상의 논리적 체계 안에서 반듯하게 세공된 청년에게 끌리는 걸 어쩔 수 없다.
이 때, 에리카가 몸이 달은 클레메에게 던지는 마조히스트적인 사랑의 제안이 시종일관 무조음악처럼 밋밋하게 전개되는 이 영화를 독특한 비등점으로 이끌고 간다. 일타일음(一打一音)의 피아노 소리가 기묘한 분열증을 드러내며 두텁게 겹이 진 현악기 소리로 미끄러지는 것도 그때부터다.
에리카는 흰 건반과 검은 건반의 명료한 분리를 사랑에서마저 지키려 한다. 그녀가 반음 아래의 세계로 들어설 때, 그건 인간의 모든 정념이 일체의 위선이나 가식 없이 알몸 그대로 드러나야 한다. 낮과 밤, 어둠과 빛, 온음계와 반음계에 대한 이런 단층적인 대비는 그것이 단층적인 만큼 명료한 분리와 철저한 계율로써 유지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때문에 욕망 자체로 분신하는 에리카의 사랑은 물감이 번지듯 농염하게 자극되는 에로티시즘에 극도의 혐오를 갖는다. 에리카는 사랑마저도 ‘일타일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건 가장 확실한 육체적인 자극, 즉 폭력을 동반한다. 사랑의 반음계가 곧 폭력인 셈이다.
그러면서 완벽한 폭력과 사랑의 이중주가 완성되길 꿈꾼다. 에리카가 자신 못지 않게 괴팍하고 이기적이고 욕망 덩어리인 엄마에게 정통으로 스트레이트를 날리는 초반부 장면을 떠올리면 그녀의 이런 사랑은 무슨 무슨 콤플렉스 하면서 20세기 서구인들의 무의식을 재단해온 정신분석학에 대한 독한 환멸로 보이기도 한다.
요컨대 감독은 인간의 온갖 이성적 분석이 완전히 담지해 내지 못하는 감정의 잉여, 음악으로 치면 연속적 패턴에 반한 즉흥성과 의외성의 진폭이 완고한 이성을 괴물로 변하게 한다는 인간 심연의 모순된 진실을 까발리고 있는 것이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쇼팽의 현란한 피아노 선율을 악보에서 완전무결한 기계적 공식으로 끄집어내는 연주자의 이성 자체가 사실은 인간이 숨기고 있는 괴물이었던 셈이다. ‘피아니스트’는 그 누구나 품고 있으면서도 완벽하게 숨기려 애쓰는(그럴수록 더욱 황당한 방식으로 ‘실체’를 드러내는) 괴물을 떡 하니 보여주고는 ‘이게 설마 당신 이야기는 아닐 거라고 우기겠는가?’ 라면서 은근한 추파를 던지는 듯하다.
그렇지만 영화는 아무런 결론도 보여주지 않고 끝난다. 베르크 풍의 기괴한 현악선율이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건 그때부터다. 안개는 모호성을 상징하기도 한다. 영화 ‘피아니스트’가 던지는 알쏭달쏭한 매력은 별다른 자극이나 굴곡 없이 스며들었다가 모든 게 기억의 저편으로 넘어간 이후에야 비로소 온몸이 축축하게 젖어 있다는 걸 깨닫게 되는 삶의 어떤 경험과도 비슷하다. 우리는 늘 사건 속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모든 사건은 일정한 시간의 음계 위에서 진행된다.
그런데 어느 순간 우리는 그 일사불란한 시간적 질서로부터 이탈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건 일종의 예외적 변수에 속할 만한 것이지만, 예기치 못한 그런 변수에 의해 되레 더 논리가 완고해질 때가 있다. 이건 온음 사이에 놓인 반음에 의해 온음의 균형미가 완성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에리카의 사랑은 그녀가 그토록 집요하게 지켜 내려 하는 이성적 완고함의 변형된 얼굴이다. 그런데 그 얼굴은 늘 안개에 가린 듯 모호하고 불분명하고 이중적이다. 고통이 환희와 겹쳐있고, 슬픔에 짓눌려 기괴하게 웃는 듯한 소리로 오래 반향한다.
그 괴물은 홀로, 안개 속에 숨은 채, 느릿느릿 피아노 건반을 두드린다. 선율은 쇼팽이지만, 어딘가 이가 빠진 듯 구멍난 뼛속으로 스미는 듯 섬뜩한 이계(異界)의 바람 소리. 어쩌면 그건 이성이 질식시켜버린 원시성의 협화음인지도 모른다. 영화가 끝난 지 한참이 지난 후에야 내 피부에 들러붙은 그걸 듣고는 한동안 내 말소리가 이상한 괴물의 울음처럼 들려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사랑이란 곧 내 속에 잠들어있는 그 괴물을 깨우는 동시에 죽여야 하는 모순된 게임이란 걸 알아 버렸기 때문이다.
잘 알려졌다시피 이 작품의 원작은 200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독일 작가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소설 ‘피아노치는 여자’(이병애 옮김, 문학동네)이다. 이 소설이 우리나라에 출간된 건 1997년이다. 하지만 그 당시엔 별로 주목 받지 못했다. 파격적인 성애 묘사와 비틀린 모녀 관계로 나타나는 현대성 담론에 대한 극단적인 도발이 국내 독자들에겐 별 설득력 없게 여겨졌던 탓일 게다.
‘피아니스트’가 개봉되어 화제가 되었을 무렵에도 이미 번역되어 나와 있는 이 소설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었다. 그러다가 작년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되자마자 서점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이 책이 ‘2004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라는 띠지를 두르고 다시 ‘부활’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책에 대한 반향은 크게 없었던 것으로 안다. 고백하자면 나도 아직 소설을 읽어보진 못했다. 영화를 보고 나서 뒤늦게 원작에 호기심이 생겼지만 이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소식은 잘 납득이 가지 않았다.
작품의 질이 떨어진다고 판단한 게 아니라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스웨덴 한림원이 집단으로 약을 먹은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어서였다. 책을 읽어보지 않은 입장에서 무모한 속단이긴 하지만, 아마도 엘프리데 옐리네크는 1998년 수상자인 주제 사라마구 이후 가장 의외의 수상자로 남지 않을까 싶다.
엘프리데 옐리네크는 현재 독일에서 가장 많이 연구되는 작가라 알려져 있다. 독일인의 기질이 완강하고 보수적인 것으로 유명하지만 니체 프로이트 마르크스 등 20세기를 열었던 혁명적인 사상가들이 독일어권에서 나왔다는 건 인류가 생산해낸 위대한 아이러니 중 하나다. 그런 의미에서 추측컨대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작품세계가 인문학적 관심을 불어 일으키는 건 소위 현대성 담론의 주요 화두로 떠오르는 페미니즘과 욕망, 해체주의적 사고 등이 급진적으로 뒤섞여 있기 때문인 듯하다.
적어도 영화 ‘피아니스트’에 나타난 가족관계의 해체와 남녀 사이의 권력이동은 담론의 차원이 아닌 삶의 실제적 영역에서 급격하게 변화하는 가치의 전도를 면밀하고도 냉정하게 갈파해내고 있다.
이를테면 그동안 잠재적 동인이라고만 생각되어져 왔던 무의식의 기제들이 실상은 삶의 전반을 지배하는 절대적 원천이라는 것이다. 그건 니체가 이성중심주의 철학을 ‘노예의 철학’이라 빈정거린 이후 가장 사소하면서도 가장 극렬한 형태로 드러난 정신의 모반이라 할 수 있다. 차가운 안개 속으로 들어가듯 이제 책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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